2020.7.23(木曜日) “진정성眞情性”
나의 삶을 조금씩 전진하게 만드는 것이 있다. 진정성眞情性이다. 진정성은 조용한 가운데 자신에 대한 정교한 계획과 그것을 언행으로 옮기려는 단호함, 그 언행을 반복하여 구별된 습관으로 만들려는 인내, 그리고 그 언행을 검점하고 단점을 언제나 찾아내 수정하려는 후회로 구성되어있다. 진정성은 옳고 그름, 아름다음과 추함, 정의와 불의를 초월하고 인생의 나침반이다, 진정성이 알려주는 방향은 언제나 희망과 보람으로 가득 차 있다.
인류는 이 진정성을 현대에 들어와 비로소 경험하기 시작하였다. 서양에서 이성과 과학에 대한 맹신을 불리치고 낭만주의가 도래하면서, 이원론적인 세계관을 초월하는 새로운 사상의 틀을의 가능성을 모색하였다. 니체는 그것을 발견하여 현대시대를 견인한 영웅이다. 그는 서양철학 사상과 그리스도교 교리를 초월하기 위해 새로운 생각의 틀을 제공하였다. 깨달음과 구원이란 현재의 자신을 끊임없이 극복하려는 노력이다. ‘자기극복’이야말로 현대사상의 핵심이다.
니체는 자기극복을 <Ecce Homo>에서 이렇게 독일어로 이렇게 표현하였다. Werde der du bist. 이 문장을 영어로 번역하면 ‘Become who you are!’다. 한국어로 번역하지면 난관에 부딪힌다. 관계대명사를 이끄는 절인 ‘who you are’를 ‘너’로 번역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굳이 번역하지면 불완전하게 ‘네 자신이 되어라!’ 정도가 될 것이다. 이 문장은 우리가 인생에 대한 깊은 숙고를 꾸짖고 동시에 자신이 정말 원하는 삶을 살라는 촉구다. 그가 변화무쌍한 과정의 힘을 강조하는 ‘베르덴’werden 즉 ‘-가 되다’란 동사를 사용하였다. ‘된다’는 것은 자신이 도달해야할 최종 목적지에서의 자신의 모습인 ‘존재存在’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 찬란하고 한이 없는 목적지를 향해 끊임없기 정진하라는 ‘생성生成’의 과정에 대한 찬양이다.
생성과정의 핵심은 지속적인 과거와의 연동과 갈등이다. 특히 자신이 이전에 신봉하고 있었던 믿음에 대한 재조명과 도전이다. 생성의 목적은 결코 안전한 존재의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다. 만일 우리가 자신이 진리하고 생각하는 어떤 것에 안주하고, 다른 것의 도전을 거부한다면, 그것은 이미 쇠퇴이며 부패이며 생성과정을 좌절시키는 치명적인 방해다.
우리가 ‘진리’라고 신봉하는 것이 과연 진리인가?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진리를 찾아가는, 진리를 향한 진정성이 진리다. 과거에 알던 진리가 지금에도 불변의 진리인지, 그리고 미래에도 진리로 생존할 지를 점검하는 과정이 진정성이다. 진리는 자신이 우연히 경험한 특정한 의지에 대한 해석이나 주장으로 언제나 시대착오적이고 오염되고 혹은 오해의 소지가 많다. 진리의 가장 좋은 친구는 비판으로 진리로 가는 의지는 항상 변명이 필요하다. 진리truth는 고정된 전통에 따라 나열된 은유, 환상 혹은 강요로 구성되어있다. 그러나 진정성truthfulness는 정직, 지적인 의도, 그리고 자기점검으로 가득 차있다. 사람들이 주장하는 모든 진리에 대한 의심疑心, 그 자체가 진정성의 표현이다.
진리를 추구하는 진정성에는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이해하고 잘못을 수정하고 자기기만을 제거하고 거짓과 진부가 되어버린 진리를 초월하려는 숭고한 노력이다. <요한복음> 저자가 언급한대로, 진리는 우리를 어떤 교리나 사상의 굴레에서 벗어나 어떤 것에도 구속받지 않는 자유로운 인간으로 만든다. 과학이란 의미의 독일어 ‘비센샤프트’Wissenshaft는 ‘앎이란 것을 알아내고 걸러 내는 솜씨’란 의미다. 갈릴레오는 과학을 이렇게 정의한다. “과학이란 무한한 지혜를 들어가는 대문을 여는 행위가 아니라,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무한한 실수에 제동을 거는 것이다.” 앎이란 한없이 열린 세계를 조금씩 찾아가는 과정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 선택한 일부에 대한 주장이다. 이 주장은 나의 고유한 해석일 수밖에 없다.
내가 어떤 새로운 것을 알고 관계 맺기를 시도할 때, 반드시 동반되는 과정이 있다. 이 과정이 실수다. 선진적인 인간은 어제보다 더 나은 자신을 발견하고, 그것을 온전한 자신으로 만들기 위해, 이리저리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모색할 때, 실수 할 수 밖에 없다. 짐승은 혹은 짐승과 같은 인간에겐 실수가 없다. 실수는, 자신의 행위를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성숙에서 오기 때문이다. 누가 그(녀)에서 실수를 지적하면, 그는 화를 낼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에게 그것은 실수가 아니기 때문이다.
실수는 자신이 실수 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다시는 그와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창조해낸 자식이다. 실수를 고백한 사람은, 그 실수를 극복한다. 그러나 그런 실수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영원히 실수라는 소용돌이에서 헤맬 것이다. 실수는 삶을 개선하고 풍요롭게 만든다. 실수가 없는 진리란 존재하지 않는다. 로마 스토아 철학자 세네카가 말했다, ‘에라움 후마눔 에스트’errare humanum est, 즉 ‘실수하는 것은 (너무나) 인간적이다!”
진정성은 자신의 실수를 인식하고 신기루와 같은 진리를 찾아나서는 마음의 상태다. 자신을 점검하고 평가하고, 그 어느 것도 ‘진리’라고 수용하지 않는다, 독일 문화 괴테도 <파우스트> 첫 부분에서 “인간이 분투하는 한, 실수를 저지른다.Es irrt der Mensch, so lang er strebt”라고 말한다. 진정성은 실수와 잘못을 찬란한 미래를 위한 발판이 된다. 무슨 일이던, 내가 무엇을 시도하던, 그것은 온전히 나의 정성을 고스란히 담고 있어야한다. 나는 내가 대하는 모든 생명들과 물질들을 진정으로 대하는가? 전정성이란 등불을 들고 오늘을 헤쳐 나가는가?
사진
<로마주변 평원에 앉은 괴테>
독일 화가 요한 티슈바인 (1751–1829)
유화, 1787, 164 cm x 206 cm
프랑크푸르트 스테델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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