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7.22(水曜日) “남아있는 나날”
나는 ‘남아 있는 나날’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나는 내 자신의 소명을 발견하고 그것을 위해 온전히 존재하는가? 혹은 어제와 같은 삶을 반복하여 그럭저럭 연명하는가? 나는 오늘 내 자신의 가능성과 잠재력을 발굴하기 위해, 머리를 하늘 위로 치켜세우고 눈을 저 먼 곳에 고정시키고 한 걸음 한 걸을 정진하는가? 아니면 구태의연한 과거와 관습에 서로 잡혀, 어제의 부산물인 ‘현재 상태’를 고착화하기 위해 변명하는가?
요즘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이라는 장소에서 일어나고 있는 뉴스를 보면, 깊은 한 숨이 나온다. 특히 우리에게 잠재된 가능성을 일깨워 희망을 보여줄 것을 기대하고 선출한 정치 지도자들을 보면, 더욱 그렇다. 대부분 과분하게 주어진 자신의 직분이 무엇인지, 망각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그것을 남용한다. 그들은 볼썽사나운 ‘오만傲慢’으로 가득 찬 바보들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대한민국은 영국 엑톤 경이 예언한대로 “절대 권력은 반드시 타락한다”라는 명제에 과거도 그랬지만, 여전히 딱 어울리는 국가다.
19세기 미국 사상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국가의 근간이나 경쟁력은 국가주도적인 ‘정책政策’이 아니라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양심良心’이라고 말한다. 그는 ‘시민불복종’(1848년)이라는 에세이에서 자신의 스승 랄프 왈도 에머슨이 정부를 묘사한 한 문구를 수정했다. 에머슨은 “정부는 가장 덜 다스릴 때 최선이다‘라고 말했다. 소로는 ’정부는 전혀 다스리지 않을 때 최선이다‘라고 수정하였다. 양심은 개인이 고요를 수련할 때, 들리는 총성이다. 하루 종일 모여,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상대방을 억압하여 자신의 이기적인 뜻을 관철시킬 망상으로 가득 차 있다.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가 효율적으로 작동하기 위한 방안은 무엇인가? 자신이 우연히 속해있는 이념중독에서 벗어나, 전혀 새로운 길을 모색할 용기가 있는가? 며칠 전 본 영화는, 그런 길을 파괴적으로 용감하게 시도하라고 나를 부추긴다. 일본 나가사키에서 태어난 영국작가 가즈오 이시구로(1954년-) 원작 영화 ‘남아있는 나날’(1993년)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 스티븐스(안소니 홉킨스 역)는 달링턴 경 집안 전체를 관리하는 ‘집사중의 집사’다. 그는 일생 달링턴 가문에서 자신에게 맡겨진 집사역을 완벽하게 수행한 인간이다. 보냈다. 그에게 최선의 덕목은 집사라는 직업에 알맞은 위엄과 인내다. 그는 자신의 몸으로 이 덕목을 훈습하였다. 위엄으로 가득 찬 얼굴, 몸짓, 그리고 말, 이것이 그의 정체성이다. 그는 집사의 역할을 한 것이 아니라 집사 자체였다.
이 영화는 1950년대 한 장면에서 시작한다. 스티븐스는 제2차 세계대전 전에 달링턴 가문에서 함께 일했던 오래된 종업원인 캔턴 양(엠마 톰슨 역)으로부터 편지를 받으면서 시작한다. 그는 그녀의 편지를 읽으면서 자신이 오랫동안 아련하게 잊고 있었던 인생의 중요한 무엇을 느낀다. 편지는 그에게 이 상실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켄턴 양은 훌륭한 가정부였다. 이 두 둘은 달링턴 가문의 두 기둥이었다. 스티븐스는 켄턴이 자신으로부터 공적인 관계 이상을 원할 수도 있다고 상상하여 실제로 연인관계로 발전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스티븐스는 ‘집사’로서의 역할이 중요했다. 언제나 근엄함과 절제 유지하였다. 자신의 삶에 사랑은 사치여서 수용할 수 없었다. 마침내 캔턴이 사직하게 되었다, 스티븐스는 그녀를 직원으로만 취급하여 작별인사를 한다. 그렇게 그녀는 사라졌다.
달링턴 가문의 새 주인인 패러데이에게 새로운 가정부가 필요했다. 그는 스티븐스를 시켜 캔턴이 달링턴 가문에 재취업하고 싶은지를 알아보라고 부탁한다. 스티븐스는 켄턴을 찾아 한적한 시골을 운전하면서 1930년대에 캔턴과 함께 지냈던 과거와 있을 수도 있었던 사랑을 회상한다. 스티븐스는 지금 깨달았다. 만일 그가 20년 전,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여 캔턴과 사랑에 빠져 가정을 꾸몄더라면, 그의 인생은 지금과 분명 달랐을 것이다.
스티븐스는 이 미묘한 감정을 안고 캔턴 집에 도착했다. 중년이 된 그녀는 결혼하여 이제 첫 손주를 볼 참이다. 그녀는 고백한다. 그녀는 한 때, 스티븐스를 사랑하기를 시도했으나, 그가 그 사랑을 받아 주지 않자 낙심했다고. 만일 스티븐스가 그 당시 집사로의 가면을 걷어 내고, 독립된 남자로 사랑이라는 용기를 보여주었더라면, 이들의 인생은 달라졌을 것이다. 그들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을 것을 것이다. 스티븐스와 켄턴은 이제 비가 내리는 정거장에서 이별을 할 참이다. 켄턴은 버스에 올라 우산을 든 스티븐스를 보며 눈물을 흘린다. 이들이 용감한 선택을 통해 이우었을 사랑이라는 기적을 놓친 회한 때문일 것이다. 캔턴이 할 수 있는 말은 ‘안녕! 몸조심하세요!’가 전부다. 그는 자동차를 몰고 다시 달링턴 가문으로 돌아온다. 그가 다시 집사라는 역할로 ‘남아있는 나날’들을 보낼 것이다.
스티븐스 이야기의 비극은 그가 사랑에 빠질 기회를 상실한 것뿐만 아니다. 그가 달링턴 가문에서 집사로서의 역할을 넘어서는 자신의 잠재력을 실험해볼 기회를 놓쳤다는 사실이다. 그에게 인생은 자신이 속한 사회가 규정지은 집사로서의 역할이 전부다. 그는 자신이 지닌 가능성과 잠재력을 탐색하여, 자신에게 의미가 있고 그래서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
대부분의 인간은 그런 삶의 존재를 상상하지도 않고 그래서 시도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대부분 우리에게 우연히 주어진 그 직업, 그리고 그 직업이 가져다주는 정체성에 의해 감금되고 중독되어 산다. 물론 우리가 하는 직업에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지만, 그 직업이 우리의 가능성을 정의하고 발전시킬 수는 없다. 우리는 종종 일상에서 예상치 못한 기회를 가름하기 위해 일상을 해체하고 새로운 방향으로 모험을 시도해야한다.
국민 모두가 행복한 선진국을 열망하는 대한민국이 아직도 과거의 이념에 노예가 되어 두 패로 갈라져 소모적인 싸움을 지속한다. COVID-19이 가져온 위기를 가장 한 기회에서 스티븐스와 같은 어리석은 일을 반복하지 않으면 좋겠다.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는 일이 자신에겐 백번 옳지만, 그 일이 새로운 시도이며 모든 사람에게 감동을 주지 못한다면, 그것은 진부하다. 우리민족이 지닌 가능성과 잠재력을 감지할 수 없고 신장할 수도 없다. 우리는 이 ‘남아있는 나날’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연명할 것인가, 아니면 무엇인가 가슴에서 북받쳐 올라오는 새로운 것을 시도할 것인가?
사진
<영화 ‘남아있는 나날’의 스티븐스와 캔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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