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7.18.(土曜日) “완벽完璧”
산책에서 만난 고니들은 저마다 완벽完璧하다. 완벽의 첫 번째 조건은 누구를 흉내 내지도 않고 눈치를 보지 않는 것이다. 잔잔하게 흘러내려오는 하천에 두 발을 담구고, 온전히 그 순간에 몰입할 뿐이다. 어디를 보는지, 나는 도무지 알수 없다. 일곱 마리 고니가 아무렇게나 서 있지만, 그 구도는 언제나 완벽하다. 우리 인간들처럼 하루 종일 타인을 쳐다보면서 그들의 장점을 과장하고 부러워하고 단점을 침소봉대하여 떠들지 않는다. 고니는 자신의 발에 매 순간 부딪치는 물살들을 느끼며 영원히 멈춰버린 순간을 즐긴다.
내 아이폰에 잡힌 일곱 마리 고니들이 그렇다. 자신들의 모습을 금방 사라져버리는 흔들리는 시냇물 위에 담았다. 시냇물에 담긴 그림자는 물과 함께 저 멀리 떠내려가지 않는다. 그들의 모습은 그 사라질 물결 위에서 데칼코마니가 되었다. ‘또 다른 자신’으로 신비하게 나타난다. 물결에 흔들이는 또 다른 자신도 완벽하게 독립적이다. 그 뿐만 아니라 시냇가 건너편에 무성하게 자라난 초록 나무들도, 시냇가 이쪽 편에 자연스럽게 피어난 잡초들로 무질서하게 질서정연하고 자연스럽다. 내가 관찰하지 않는 모든 순간에도 그럴 것이다.
인간은 문명과 문화를 구축하면서,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화자찬한다. 자신을 중세에 등장한 ‘거대한 존재의 사슬’Great Chain of Beings의 위계질서에서 신 바로 다음에 위치시켰다. 그러나 인간은 저 고니보다 아름답지도 고격하지도 않고 저 나무나 풀잎보다 자연스럽지도 않다. 인간은 편안한 삶에 안주安住하면서 진부해 지기 시작하였다. 한 곳에 정착하여 살면서, 스스로 존재의 감옥監獄을 만들어 스스로 감금시켜왔다.
우리는 새로운 것을 창조하기 위해, 이 감옥으로 부터 벗어내, 미지의 장소로 이주移住하려는 원초적인 힘을 잃은 지 오래다. 현대인들은 자동차와 비행기를 만들었지만, 점점 자신의 몸에 붙어있는 다리를 사용하는 방법을 잊어버렸다. 결국 근육을 회복하기 위해 일부러 등산하고 운동시설에 가지만, 결국 스핑크스가 오이디푸스에게 예언한대로, 나이가 들면 지팡이에 의존하여 세발로 걷는다. 자동차와 비행기가, 다리에 힘을 주기 보다는, 발꿈치 뼈 뒤쪽 위에 위치한 아킬레스힘줄에 박힌 파리스의 화살이 되어버렸다.
인간의 손목에는 보기에도 부담스런 정교한 제네바 손목시계가 부착되어있지만, 우리는 태양과 달의 위치와 모양에 따라 계절의 움직임을 읽어내는 방법을 잊어버렸다. 영국 캠브리지 대학 천문대에가 매년 발행하는 항해에 필요한 ‘그리니치 천체력’Greenwich Nautical Almanac를 통해 과거 하늘의 정보를 읽지만, 오늘 밤하늘의 별의 위치를 통해 시간을 흐름을 감지하지 못한다. 우리는 춘분과 추분, 하지와 동지를 달력을 통해 확인한다. 다른 야생동물들처럼, 그 절묘한 변화를 몸의 기운으로 느끼지 못한다. 우리마음 속에 천체의 기운을 읽는 나침반을 잃어버린 지 오래다. 이전에는 수백 개 전화번호를 기억했지만, 핸드폰은 우리의 기억능력을 감퇴시켰다. 문명의 이기들이 우리가 행복한 삶을 사는데 정말 필수적인가?
종교와 철학이 건물, 교리 혹은 학파로 전락하면서, 그 창시자들이 깨달은 참되고, 착하고, 아름다움을 지향하는 가치가 사라졌다. 오히려 인간을 배타적이며 이기적인 인간으로 변모하는 도움이로 변질되었다. 스토아철학은 남았지만, 스토아적인 인간을 찾을 수가 없고, 그리스도교는 남았지만, 사랑이란 거룩한 가치를 통해 순교하는 이들을 찾아볼 수가 없다. 난해한 철학을 가르치는 사람들은 많아도, 철학적인 인간은 드물다
인간은 눈치를 보느라 겁에 질려있다. 누가 보면, 즉시 타인의 입장에서 자신은 수틀리는 데가 없다고 변명할 참이다. 그(녀)는 더 이상 두발을 땅에 디디고 허리와 머리를 곳곳이 세우고 시선을 15도 위를 바라보면서 천천히 걷지 않는다. ‘나는 생각한다’라고 말하지 않고 어디서 들은 성인이나 철학자의 말을 되풀이 하면서, 자신이 마치 그 자인 것처럼 행동한다. ‘나는 스스로 존재한다’라고 선언하지 못하고, 성인이나 현자를 인용한다. 그는 자신의 운명적인 시간을 알아 우주선과 같은 봉우리를 피우는 민들레나 한 순간에 장렬하게 피었다가 사라지는 목단 앞에서 말을 잃는다. 스스로 창피하기 때문이다. 장미는 과거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는 적이 없고 옆에 핀 장미를 부러워하며 흉내를 낸 적이 없다. 민들레나 목단은 스스로 존재하며 그 순간을 만끽한다. 자신의 존재를 매 순간 만끽하기 때문에 완벽完璧하다.
인간은 자신이 더 이상 경험할 수 없는 과거에 만든 이념이나 교리에 집착하여 그것을 진리라고 시대착오적으로 우긴다. 현재를 직시할 마음의 여유도 없고 현실을 직시한 시력도 없다. 영원히 오지 않을 내일을 걱정하면서 세월을 보낸다. 인간은 시간을 초월하여 영원이 된 이 순간에 몰입할 때만 행복하다. 저 시냇물은 자신이 가야할 곳을 향해 졸졸 흘러가고 저 옥수수는 자신에 열매를 맺었다고 산들 부는 바람에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낸다. 엘리야가 시내 산 동굴에서 들었다는 ‘섬세한 침묵의 소리’들이다. 완벽이란 이 순간에 몰입하여 유유자적하려는 마음가짐이다. 나는 지금을 살고 있는가? 아니면 과거의 후회와 미래의 걱정으로 겁에 질려있는가?
사진
<유유자적하는 일곱 마리 고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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