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7.17(金曜日) “밧세바 신드롬Bathsheba Syndrome”
영국의 역사학자이자 정치인이었던 엑턴경(1834-1902)이 말한대로, 권력은 반드시 부패하는가? 권력은 원래 자신의 소유가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잠시 동안 주어진 임무일 뿐이다. 인생이란 무대에서 내려올 때, 그 사람에 대한 평가는 그(녀)가 자신이 맡은 배역을 충실하고 겸손하게 실천했는냐에 달려있다. 엑턴경은 권력을 휘두른 위대한 인간들은 항상 나쁜 사람들이로 단정을 지었다.
요즘 대한민국을 후진국으로 만들려는 위험은 COVID-19이나 부동산투기세력이 아니라, 겉으로는 존경을 받는 리더들의 타락이다. 리더들은 남들이 가본 적이 없는 길을 앞장서서 개척하는 사람이다. 그런 참신한 용기와 결단을 지니기 위해 무엇보다도 필요한 덕목은 자기성찰과 자기절제다. 자신에게 리더인 사람이 시간이 지나면 타인에게도 리더가 되기 때문이다. 가면을 쓰고 리더인 척하는 사람을 곧 들통나게 되어있다. 리더가 리더인 이유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은 도덕적 군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잘못을 지적해주는 참모가 있고 그런 참모의 충고를 들고 잘못을 시인하는 용기의 소유자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로마 철학자 키케로가 정의한대로 ‘실수하는 동물’이다. 그러나 다른 동무들과는 달리, 그 실수를 돌아보고 다시는 반복하기 않겠다고 결심하여, 점점 그 실수를 줄게 만든다. 서양의 시문학은 주제는 다음 세 가지다. 비극悲劇, 희극喜劇 그리고 애가哀歌. 이 세 가지 시문학 장르는, 그것이 다루는 대상, 언어, 내용, 그리고 결말이 판이하게 다르다.
고대 그리스어에서 ‘비극’을 의미하는 ‘트라고디아’tragodia는 원래 공동체가 신에게 의례를 드리면서 희생 제물로 바치던 ‘염소’tragos를 위한 ‘노래’aoidē였다. 아테네는 기원전 5세기 ‘민주주의’라는 정치체제를 구축하면서, 시민교육을 시작하였다. 리더는 이 시민들 중에 선출되기 때문에, 시민교육은 곧 리더 교육이었다. 아테네는 공정한 경쟁을 통해 시민들에게 감동과 깨달음을 줄 비극작품들을 선정하였다. 오늘날 아카데미 영화제와 같은 잔치다. 당시 아테네 시민의 1/3에 해당하는 2만명 정도가 일주일동안 진행되는 이 비극경연을 관람하였다. 그들은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하는 주인공에 한없는 ‘공포’와 ‘연민’을 느꼈다. 아테네 시민들은 가장 우수한 세편의 비극을 선정하여 상을 주었다.
비극은 왕이나 귀족과 같은 리더에 관한 내용이다. 희극은 보통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비극의 주인공은 전설적인 왕일 수도 있고 자신들의 리더일 수도 있다. 비극은 당시 평민들이 사용하는 언어가 아니라 왕족이 사용하는 품격이 있는 언어를 사용한다. 비극은 행복으로 시작하여, 불행으로 마친다. 반면에 희극은 불행으로 시작하여 행복으로 마친다. 단테의 <신곡>이나 신데렐라이야기가 전형적인 희극이다. 비극의 주인공은 자신의 주위에서 일어나는 불행한 사건들의 원인을 추적한다. 이 비극을 관람하는 아테네 시민들을 모두, 그 원인이 주인공이란 사실을 안다. 비극은 주인공만이 그 이유는 모른다는 사실이다.
비극은 주인공의 자살 혹은 추방으로 마친다. 비극적인 주인공들의 특징 세가지가 있다. 자신의 삶뿐만 아니라 자신 속한 공동체의 운명을 결정하는 치명적인 약점들이다. ‘오만’傲慢, ‘아둔’, 그리고 ‘자기복수自己復讎’다. 이 세 가지는 역설적으로 리더가 지닐 수밖에 없는 속성들로, 세속적인 성공의 자연스러운 부산물들이다. 주인공은 무명씨에서, 혹은 부모가 왕이거나 부자라서,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위치에 오른다. 그러기에 리더는 ‘오만’할 수밖에 없다. 준비가 되지 않는 개인에게 과분한 부와 권력을 그 대상을 타락시킬 수밖에 없다.
첫째 비극적 주인공은 오만한다. 오만이란, 자신이 잘나서 그 직책을 획득했다는 착각이다. 자신이 누리는 혜택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마음상태다. 그 직책이 그(녀)에게 주어진 이유는, 그가 오만방자하게 권력을 휘두르는지 보기 위해서다. 그것은 마치 아이에게 불을 가져다주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는 불장난으로 스스로 화상을 입을 수도 있고 집을 모두 불태울 수도 있다. 아이는 불을 잘 다룰 수 있도록 오랜 기간 동안 수련해야한다.
둘째 그 오만한 주인공은 아둔하다.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여유도 실력도 없다. 그 주위사람들은 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그에게 충고하지 못한다. 그들은 오만으로 무장한 리더를 이길 수 없다고 인정한 비겁자이거나 그의 행위에 동조하는 공범들이다. 아둔의 다른 말은 ‘장님성’이다. 한 치의 앞을 볼 수 없는 시커먼 안경으로 눈을 가렸기 때문에, 그는 위험하고 무식하다. 자신이 하는 언행이 항상 옳다고 주장하고, 그런 주장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숙청한다. 주위 사람들은 그의 오만하고 아둔한 언행이 비극적인 파국으로 곧 진입할 을 것이라는 것을 알지만 묵인한다.
셋째, 오만과 아둔으로 무장한 주인공의 비극적인 결말은 결국 칼을 자신에게 겨누는 ‘자기복수自己復讎’다. 테베의 왕 오이디푸스는 테베에서 창궐하고 있는 역병의 원인을 추적한다. 그는 외딴 길에서 만난 어떤 사람이 길을 비켜주지 않아 그를 살해한다. 자신의 감정에 휩쓸려 상대방을 폭력으로 제압하고 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오만하고 아둔하다. 오이디푸스는 그 살해당한 자가 바로 자신의 친부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테베라는 도시에서 왕이 되어 자식을 낳는다. 그러나 그 왕비가 오래전에 자신을 산속에 유기한 어머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아내이자 어머니는 이 사실을 알고 목매달아 자살한다. 오이디푸스는 어머니가 자살할 때 사용한 브로치로 자신의 두 눈을 찔러 장님이 된다. 이 일련의 과정이 바로 ‘복수’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눈을 상하게 함으로,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있는 잘못한 저지를 추악한 자신에게 복수한 것이다. 자신을 향한 복수는 인과응보의 결과다.
서양에서는 성공한 리더가 지닐 수밖에 없는 오만, 아둔, 그리고 복수라는 일련의 과정을 정신병리현상으로 여겼다. 그들은 이 현상을 성서에 등장하는 인물로 설명한다. ‘밧세바 신드롬Bathsheba Syndrome’이다. 밧세바는 이스라엘 다윗 왕이 첩이자 솔로몬의 어머니다. 밧세바는 원래 다윗의 신하인 우리아의 아내였다. 이스라엘 최고의 영웅이자 예수가 자랑스런 조상인 다윗은 인간이 열망하는 세속적인 성공의 화신이었다. 그는 소싯적에 블레셋 거인 골리앗과 일대일 정면대결에서 무너뜨렸고 예루살렘이란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여 12지파로 나뉜 이스라엘을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통일시켰다.
고대 이스라엘 역사가는 다윗의 위대한 업적뿐만 아니라 그의 수치스런 민낯을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성서가 오랫동안 인류의 사랑을 받아온 이유는, 이 치욕적인 내용도 가감 없이 담아 우리에게 묵상거리로 주기 때문이다. 그(녀)는 다윗의 치명적인 약점을 구약성서 <사무엘하> 11장과 12장 전체에 할애하였다. 다윗은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완벽한 남성이었다. 다윗은 독보적인 ‘알파 남성’으로 인류 역사상 첫 번째 수퍼스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세 피렌체가 르네상스를 일으키기 위해 제작한 동상이 미켈란젤로의 ‘다윗 동상’이다. 영웅은 벗어날 수 없는 흠이 있기 마련이다. 다윗 삶의 정점에서 그는 비극적인 순간을 맞이한다. 오이디푸스처럼, 영웅이기 때문에 피할 수 없고 해결할 수 없는 ‘비극’이란 터널에 들어선다.
일생 동안 야전사령관으로 명성을 쌓은 다윗이 나태해졌다. 부하들은 들판에서 진을 치고 전쟁을 치그로 있는데, 자신은 예루살렘에서 느긋하게 한가롭게 지중해 저녁노을을 즐기고 있었다. 다윗은 자신이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않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망각하였다. 그는 아마도 이스라엘을 통일하고 예루살렘을 신이 거주하는 시온성으로 만들고, 그 후에도 많은 전쟁에서 승리한 후 자만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자신이 일생 해오던 전략을 수정할 필요가 없고 자신이 하던 일을 부하에게 맡겨도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군대를 이끌고 전쟁터에 나가는 것이 왕이 하는 일인데 다윗은 궁궐에서 빈둥거렸다.
다윗이 이젠 활력을 잃고 궁궐에서 뒹굴며 부인과 수많은 첩들과 함께 아이들의 재롱을 보는 ‘할아버지’가 된 것이다. 골리앗의 머리를 자르던 다윗과는 사뭇 다르다. 그의 자존심과 자기존경심이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어느 날 저녁, 다윗은 잠깐 눈을 붙였다가 일어나, 왕궁의 옥상에 올라가서 거닐었다. 이 순간을 이스라엘 역사가는 이렇게 표현한다.
“어느 날 저녁에 다윗은 침대에서 일어나 궁전 옥상을 거닐다가 목욕을 하고 있는 한 여인을 보게 되었다. 매우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사무엘하> 11.2
그 여인은 아름다움을 넘어선 매력적인 여인으로 ‘매우 아름답다’라고 표현되었다. 이 순간은 다윗의 비극은 시작하였다. 그녀를 쳐다보면 볼수록 빠져들어, 자신이 왕이란 사실을 망각한다. 욕망이 다윗의 주인이 되었다. 다윗은 욕망의 노예가 되어, 욕망이 명령하는 대로 행동하는 꼭두각시로 전락하였다. 그는 신하를 아무도 모르게 몰래 보내 그 여인이 누구인지 알아본다. 그 여인은 오늘날 터키에서 온 ‘히타이트’ 용병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였다. 다윗은 분명 그녀가 유부녀인 사실을 알았지만 그녀에게 궁궐로 들어오라고 비밀스런 메세지를 보낸다. 다윗은 권력을 남용하여 밧세바를 임신시켰고 그의 남편 우리아를 전쟁터에서 전사하도록 조작하였다.
이스라엘을 위해 골리앗과의 대결에서 승리하고 전략적인 도시 예루살렘을 건설한 영웅 다윗이 성공한 리더에게 찾아온 ‘오만’과 ‘아둔’에 사로잡혔다. ‘밧세바 신드롬’이란 현상의 원조인 다윗에겐, 그의 잘못을 깨우쳐주는 충실한 참모하나가 있었다. 나단이다. 나단은 절대 권력을 쥔 다윗에게 비유를 들어 재미있는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들려준다.
“어떤 성에 두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한 사람은 부자였고 한 사람은 가난했습니다. 부자에게는 양도 소도 매우 많았지만, 가난한 이에게는 품삯으로 얻어 기르는 암컷 새끼 양 한 마리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이 새끼 양을 제 자식들과 함께 키우며, 한 밥그릇에서 같이 먹이고 같은 잔으로 마시고 잘 때는 친딸이나 다를 바 없이 품에 안고 잤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부잣집에 손님이 하나 찾아 왔습니다. 주인은 손님을 대접하는데 자기의 소나 양은 잡기가 아까 와서, 그 가난한 집 새끼 양을 빼앗아 손님 대접을 했습니다.”
<사무엘하> 12.1-4
이 이야기를 들은 다윗은 화를 낸다. 그런 악행을 저지른 사람을 죽어 마땅하다고 말한다. 그러자 나단이 다윗에게 말한다. “당신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그러자 즉시 다윗이 자신의 과오를 시인한다. “제가 신에게 죄를 지었습니다.” 다윗이 자신의 잘못을 뉘우쳤지만, 밧세바와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죽고 아들 압살롬의 살해 위협으로 예루살렘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자신의 치명적인 실수로 비극적인 삶을 살았지만, 밧세바 사이에서 아들을 하나 낳았다. 솔로몬 왕이다.
리더는 밧세바 신드롬 환자일 수밖에 없다. 그가 이 신드롬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나단와 같이 측근에서 자신의 잘못을 적나라하게 지적해 주는 참모와 참모의 말을 새겨듣고 자신의 잘못을 바로 시인하려는 용기와 결단이다. 만일 다윗에게 나단이 없었다면, 그는 역사에 이름을 남기지 못했을 것이다. 솔모몬도 없고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도 존재하지 않고 예수도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리더뿐만 아니라 누구에게라도, 자신의 잘못을 지적해주는 나단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런 지적을 수용하려 자신의 삶을 수정하려는 용기가 인간을 한 단계 위로 도약시킬 것이다. 당신에겐 나단과 같은 친구나 구루가 있습니까? 그의 충고를 수용할 정도로 자신을 응시하고 절제하십니까?
사진
<밧세바>
프랑스 신고전주의 화가 장 레옹 제롬(1824–1904)
유화, 1889, 60.5 cm x 100 cm
개인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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