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7.13.(月曜日) "타인집중他人執中"

2020.7.13.(月曜日) "타인집중他人執中"

더 나은 자신을 만드는 유일한 방법은 자기집중自己執中이다. 육체의 시선으로 남을 관찰하지 말고 마음의 시선으로 자신을 응시해야한다. 타인집중他人執中은 나와의 차이점을 부각시켜 감정적으로 반응하게 만든다. 인간은 자신과 다른 점을 여간해선 있는 그대로 수용하지 못한다. 그것에 대한 반응은 대개 부러움을 거쳐 시기猜忌로 이어진다. 부러움은 자기집중을 수련하지 못한 사람들의 타인집중에서 태어난다. 그것은 자신만의 특별한 자신을 찾지 못하게 방해하고, 남들이 가진 어떤 것을 부러워하게 만든다.

고대 로마인들은 이런 부러움을 라틴어로 ‘인비디아’(invidia)라고 불렀다. 로마 장군들이 전쟁에서 승리하여 로마로 돌아올 때, 전차에 남성 성기모양의 인형인 ‘파키누스’(fascinus)를 달았다. 로마 장군을 부러워하는 사람들의 강렬한 선망의 눈길을 주술적으로 방지하겠다는 부적이다. 이 ‘선망의 눈길’이 바로 ‘인비디아’다. ‘부러움’을 의미하는 영어단어 ‘엔비’(envy)가 바로 이 단어에서 파생했다. ‘인비디아’는 ‘어떤 대상을 넋을 놓고 보다’라는 의미를 가진 라틴어 동사 ‘인비데레’(invidere)에서 파생했다. ‘인비데레’는 ‘보다’를 의미하는 ‘비데레’와 ‘-앞으로 깊이 들어가’라는 의미를 지닌 접두사 ‘인’의 합성어다. ‘인비디아’는 자신에게 온전히 몰입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이 가진 부, 권력 혹은 명예를 부러워하는 마음이다. 한자로 남을 부러워하는 마음을 ‘선망’(羨望)이라고 부른다. 부러워할 ‘선’(羨)자는 다른 사람이 가진 ‘양’(羊)을 보고 탐내며 그것을 소유하여 먹고 싶어 저절로 입 밖으로 ‘침’(㳄)이 흘러나오는 모양이다.

<요한복음> 7장 53절~8장 11절은 예수의 자기집중과 당시 유대지식인들의 타인집중을 비교한다. 이 이야기는 전통적으로 ‘페리코페 아둘테라이’Pericope Adulterae라고 알려진 ‘한 간음한 여인’에 관한 이야기다. 여기에 대결하는 두 당사자는 예수라는 한 청년과 당시 유대지도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다. 예수는 당시 랍비 전통 안에서 훈련을 받았지만, 그 밖에 있었다. 그는 인간의 내재적인 힘을 키우고 그 힘을 믿는 것이 삶의 가장 중요한 원칙이라고 했다. 에머슨은 예수의 깨달음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부러워하는 것은 무식이며 흉내는 자살 행위다.”(envy is ignorance and imitation is suicide)

예수는 자신에게 집중하고 자신을 깊이 신뢰하는 것, 이것이 사람들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병든 사람들 치료할 때마다, ‘내가 당신을 고쳤습니다’라고 말하지 않고, ‘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구원했습니다’라고 말한다. ‘당신의 믿음’은 다음 두 가지로 해석된다. 첫째, 신이 목적어가 되어 ‘신에 대한 당신의 믿음’이다. 둘째, 스스로가 목적어가 되어 ‘자신이 대한 믿음’이다. 첫 번째 신에 대한 믿음도 결국, 그렇게 될 것이라는 자기믿음에서 출발한다.

유대학자들은 자신들의 정체성과 전통을 무시하는 예수를 궁지에 몰아넣으려 한다. 그들은 간음하다 잡힌 여자를 끌고 와 가운데 세워놓는다. 그리고 예수에게 말한다. “랍비여! 이 여자가 간음을 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서 이러한 여자를 돌로 쳐서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그러한데 선생님은 이 일을 놓고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그들은 예수를 자신들과 같은 직업을 가진 랍비로 여겨 그를 ‘선생님’이라 부른다. 선생님을 아람어로 하면 ‘랍비’, 즉 ‘위대한 사람’이라는 의미다.

이들은 간음 현장에서 여자만 잡아온다. 이 여자와 간음한 상대 남자는 어디 있는가? 당시 유대 율법은 남성 중심적으로 작성되었으며 여자는 항상 무시하거나 약탈해도 되는 약자였다. 자신들의 욕망을 해소하는 대상을 다시 법정에 세움으로써 관습이 부여한 자신들의 사회적, 도덕적 우월감을 확인하고 싶어 한다. 이 여인과 간음한 남자는 그녀를 끌고 온 유대 지도자 중 한 명일 것이다. 이들은 그 여자를 처리할 법률까지 잘 알고 있다. 모세 율법에는 간음하다 잡힌 여인은 돌로 쳐서 죽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들은 율법 조항까지 예수에게 친절하게 알려주면서 그의 대답을 기다린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우선 자신이 가는 길과 그 길에 몰입하라는 가르침이다. 그러나 ‘간음하다 잡힌 여인’ 이야기는 다른 일화와는 전혀 달라 이해하기 힘든 아이러니가 있다. “죄 없는 자는 이 여인을 돌로 쳐라”라는 말과 몸을 굽혀 땅에 무엇인가를 그린 행동이다. 왜 유대학자와 유대인들은 이 간음한 여인을 예수에게 데려왔는가? 왜 그들은 화가 났는가? 로마제국은 유대인들의 종교와 법률 전통을 무시해왔다. 그들의 생명줄인 유대 민족성과 정체성은 허물어지고 있었다. 그들은 이 가엾은 여인을 돌로 쳐 집단적으로 살해함으로써 허물어져가는 자존심을 재건하려 한다. 어떤 힘없는 대상을 희생시키는 인간의 관행은 오래된 습성이다. 인간의 내면에는 자신에게 활기를 부여하기 위해 약한 대상에게 린치를 가하고 살해함으로 새 힘을 얻는 호모 네칸스(Homo Necans), 즉 ‘살해하는 인간’의 본성이 있다. 그러나 ‘간음하다 잡힌 여인’ 이야기의 문제점은 여기에 숨어 있는 아이러니 때문에 이해하기가 힘들다는 점이다. 왜 성난 군중은 예수의 말에 하나둘씩 사라졌는가? 예수가 땅 위에 쓴 내용은 무엇인가? 예수는 자신의 말과 행동의 숨겨진 힘을 통해 성난 군중들에게 무언가를 강력하게 표시했음이 분명하다. 그의 말과 행동에 담긴 숨은 뜻은 무엇인가?

유대학자들은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현장에서 체포해 예수 앞으로 끌고 왔다. 예수는 성전 앞뜰에서 사람들을 모아놓고 대화를 나누던 중이었다. 예수는 한순간에 할 수 없이 여인의 운명을 결정해야 하는 재판관이 됐다. 이 신비하고도 긴박한 순간에 예수는 몸을 굽혀 땅에다 손가락으로 무엇인가를 쓴다. 왜 그는 이러한 행동을 했을까?

많은 학자와 화가들이 예수의 이 행동에 관해 해석한 내용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한 설명은 시간을 벌기 위해, 또 유대학자들이 만들어놓은 이 상황에 대한 불쾌감을 표시하기 위해 알 수 없는 낙서를 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다른 설명은 그가 실제로 글을 썼다고 믿는다. 여기에 사용된 그리스어 ‘카타르라펜’이라는 단어는 실제로 글자를 쓰는 행위이기에, 예수가 여인을 데려온 유대학자들과 지도자들의 죄명을 썼다는 주장이다. 특히 <출애굽기> 23장 1절에 등장하는 “너희는 근거 없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거짓 증언을 하여 죄인의 편을 들어서는 안 된다”와 같은 내용을 썼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만일 예수가 어떤 특정한 구절을 썼다면, 모든 사건을 정확하게 기록하려는 <요한복음> 저자는 그 내용을 분명히 기록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글을 읽을 수 없었을 것이다. 글을 쓴 행동이 글의 내용보다 중요하다. 예수가 글을 쓰려는 행동은 그 자체가 하나의 상징이며 결정적인 상황에 대한 예수의 윤리적인 반응이다.

예수의 이 상징적인 행동은 그가 처한 배경을 고려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유대인들이 이 여인을 끌고 오기 전, 예수는 이른 아침 성전으로 들어갔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고 모여들기 시작했다. 예수가 가운데 앉고 사람들이 그 앞에 반원으로 앉아 그를 경청했다. 바로 그 순간에 율법학자와 바리새인들이 여인을 끌고 와서는 “그 가운데” 세워놓았다. 그들은 예수와 다른 유대인들이 평등하게 앉아 있는 이 원을 흐트러뜨린다. 그 중심에 여인을 데려다놓음으로써 그 평화로운 원을 부수고 정죄와 판단의 기준인 율법과 종교의 구태의연한 구조로 변화시킨다. 홀로 서 있는 여인의 생사여탈권은 이 유대 지도자들이 쥐고 있다. 그들은 또한 예수를 곤란한 처지로 몰아놓고는 그의 권위와 카리스마를 무너뜨리려 한다. 이 순간, 예수는 본능적으로 엉뚱한 행동을 한다. 모든 사람들의 눈은 그 여인에게 고정되어 있다. 예수는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낙서를 한다. 이 행동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작업인 경전을 필사하는 흉내를 내는 것이다. 예수의 행동은 여인에게 쏠려 있는 군중들의 눈을 한순간에 그에게 옮기도록 한다. 정죄의 대상은 힘없는 여인이 아니라 한순간에 사라져갈 흙으로 만들어진 자신이다.

땅 위에 쓴 알 수 없는 글처럼 인간은 한순간에 사라지는데, 왜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자신의 기준으로 판단하고 정죄하고 창피를 주는가? 토라의 내용이나 그 해석도 세월에 따라서 기민하게 변화하지 않으면 모래사장에 쓴 글처럼 사라질 것이다. 예수의 낙서는 종교와 교리, 그리고 이데올로기라는 이름으로 미움과 분열과 폭력을 조장하는 종교인들과 지식인들에게 자기 스스로를 탐구의 대상으로 삼으라고 말한다.

예수의 뜸들이기 전법에 유대인들은 화가 치밀었다. 몇몇 유대인들은 이미 손에 돌을 쥐고 있었다. 만일 예수가 모세의 율법대로 간음한 여인을 처형하라고 말한다면 당장이라도 돌을 던질 셈이었다. 낙서를 하던 예수가 몸을 일으켜 여인과 유대인들을 보며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 가운데 죄가 없는 사람이 가장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지십시오!”그런 뒤 그는 몸을 굽혀 다시 땅에 무언가를 쓰기 시작했다.

예수가 한 이 말은 복잡하면서도 심오하고 강력하다. 예수의 낙서가 성난 군중들의 화를 눌렀다면, 예수의 말은 그들의 손에 들린 돌을 여인이 아닌 자기 자신에게 던지게 하는 의미심장한 말이다. 예수는 여인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명령한 것이 아니라“여러분 가운데 죄가 없는 사람”에게 말한 것이다. ‘죄가 없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현재 죄를 짓고 있지 않다는 뜻인가? 혹은 과거에 죄를 한 번도 범하지 않았다는 뜻인가?

예수의 이 애매한 대답은 유대 군중들의 이분법적이고 악의적인 의도와는 전혀 다르다. 그들은 이제 집단이 아닌 개체로서 자기 자신이 죄가 없는지 돌아본다. 다른 사람에게 향했던 판단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는 것이다. 집단적으로 과거 전통에 자신들을 속박한 유대인들은 이제 개체가 되어 자기 자신을 응시하게 된다. 예수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개인을 강조한다. ‘가장 먼저’라는 말은 다른 사람들과 섞여 자신의 익명성을 유지하면서 집단 마조히즘을 즐기려던 군중에서 개인으로 홀로 서라고 축구한다. 자신의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일이며 해서는 안 된다.

“여러분 가운데 죄가 없는 사람이 가장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지십시오!”라는 말을 들은 사람들은 군중이라는 그림자에서 나와 자신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기 시작한다. 나이가 많은 사람부터 하나둘씩 돌을 내려놓고 집으로 돌아간다. 군중을 동원해 예수를 곤경에 빠뜨리고 간음한 여인을 모세 율법으로 살해하려던 이념에 사로잡힌 민족주의적 종교인들과 지식인들은 자신들의 공작이 실패로 돌아간 것을 직감하고 이내 사라진다.

마침내 예수와 여인만 남는다. 그제야 예수가 일어나 묻는다. “여자여, 사람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당신을 정죄한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까?”예수는 간음한 여인에게 자신이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어머니 마리아를 불렀던 칭호 “여자”를 그대로 사용한다. 그러자 여자는 말한다. “주님,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예수가 그 여인에게 말한다. “저도 당신을 정죄할 수 없습니다. 당신을 정죄한 유일한 인간은 당신뿐입니다. 이제부터는 당신에게 주어진 고유한 삶을 찾아 사십시오. 그 길에서 떠나지 마십시오.”

한 영화에서 여자주인공이 한 말이 생각난다. “너나 잘하세요.”

사진

<간음하지 잡힌 여인>

독일 작센 선제후의 궁정 화가 대 루카스 크라나흐Lucas Cranach the Elder (1472–1553)

유화, 1535-1540, 84 cm x 118 cm

캐나다 온타리오 국립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