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7.12(日曜日) "진에瞋恚"
세상은 화난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특히 우리가 그렇다. 요 며칠사이에 돌아가신 고 박원순 시장과 고 백선엽 장군의 장례절차와 예우에 대해 수많은 사람들이 첨예하고 대결한다. 자신의 의견이 상대방의 주장보더 월등히 훌륭할 뿐만 아니라 유일한 대안이라고 주장한다. 자신과는 다른 의견을 지닌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않고 틀렸다고 가르치려 한다. 다른 생각을 지닌 사람들의 존재를 인정할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녀)는 일상 속에서 그런 문제를 가만히 응시하여 타인의 생각과 주장을 복기하는 훈련을 해 본적이 때문이다.
인간을 짐승으로 만드는 가장 표면적인 습관이 ‘분노憤怒’다. 고대 스토아 철학자 세네카(기원전 4-기원후 65년)처럼 분노를 몸소 경험했지만 극복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는 당대 최고의 철학자, 정치가, 극작가였다. 로마의 식민지 히스파니아(스페인) 도시 코르도바에서 태어나 5세 때 로마로 이주했다. 세네카는 어릴 때 심한 결핵을 앓아 일생을 천식으로 고생하였다. 설상가상으로 심한 우울증에 시달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병마에 굴복하여 비참하게 살았을 것이다. 위대한 인물들이 위대한 이유는, 이런 역경을 극복하기 때문이다. 이 극복의 과정은 위대한 업적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다.
세네카는 불굴의 의지와 노력으로 기원후 37년에 최고 권력기관인 ‘로마 원로원’의 일원이 되었다. 당시 로마 황제 칼리굴라는 로마시민의 사랑을 독차지는 세네카를 시기하고 분노한다. 그에게 ‘자살’을 명했지만, 세네카가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중병을 앓고 있다고 판단하여, 그를 살려준다. 칼리굴라의 뒤를 이어 41년에 황제가 된 클라디우스에게도 세네카는 눈엣가시였다. 클라디우스의 아내 메살리나는 칼리굴라의 여동생 율리아 리빌라를 제거하기 위해 계략을 꾸민다. 세네카와 리빌라가 간통을 범했다는 헛소문을 퍼뜨려, 로마 원로원에도 고소한다. 로마 원로원은 세네카에서 사형을 선고하였지만, 클라디우스 황제는 다 죽어가는 세네카를 죽일 필요가 없다고 판단해 그를 코르시카 섬으로 8년 동안 유배시킨다.
클라디우스 황제는 세네카를 코르시카섬 최북단 캡 코르세(Cap Corse)라는 곳에 있는 루비라는 마을로 유배된다. 그는 로마의 귀족에서 가파른 해안 위의 한 망루에 감금된 비참한 인간으로 전락하였다. 이곳은 1,200m가 넘는 고산지대로 주변은 바위뿐이었다. 그곳 사람들은 로마에서 유배 온 세네카를 푸대접하였다. 부와 명성을 누리다가 지옥과 같은 섬에 감금된 세네카의 마음엔 분노로 가득 찼다. 그가 이 분노를 이기지 못하면 자신은 그곳에서 사라지는 비운의 주인공이 될 것임을 깨닫고는 마음을 가다듬고 책을 쓰기 시작하였다. 41년에 쓰기 시작한 ‘분노에 관하여(De Ira)’라는 책이 그렇게 태어났다. 세네카가 오늘날까지 스토아 철학자로, 작가로 불멸의 명성을 얻게 된 신의 선물이었다. 그는 자신의 분노를 응시하였다. 분노가 자신의 일부가 아니라 관찰의 대상이 된 것이다.
세네카는 말한다.
Nulla itaque res urget magis attonita et in vires suas prona
et, sive successit, superba, sive frustratur, insana;
ne repulsa quidem in taedium acta,
ubi adversarium fortuna subduxit, in se ipsa morsus suos vertit.
“분노보다 우리를 마비시키는 것은 없습니다. 자신이 힘을 가지고 모든 것을 왜곡시킵니다.
만일 분노가 성공하면, 세상에서 가장 건방집니다. 만일 분노가 실패하면 세상에서 가장 비상식적입니다. 분노는 자신이 패했을 때도 결코 물러서지 않습니다.
운명의 여신이 그의 적을 물리쳐도, 분노는 스스로 이를 갈고 있습니다.”
<분노에 관하여> III.1.5.
파탄잘리는 요가 수련을 방해하는 다섯 가지 훼방꾼 중 네 번째로 분노를 뽑는다. ‘분노’를 의미하는 산스크리트어로 ‘드베샤’dveṣa는 불교 용어로는 ‘진에瞋恚’다. 평정심을 흩어 놓는 세 가지 번뇌인 삼독三毒, 즉 탐진치貪瞋癡 (탐욕貪欲, 진에瞋恚, 우치愚癡)의 두 번째에 해당한다. ‘진에’는 자기의 편협한 생각의 노예가 되고, 그 생각을 넘어서는 주장을 하는 사람에게 습관적으로 나무라고 성내는 잘못된 습관이다. 파탄잘리는 <요가수트라> 훈련경 8행에서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진에를 정의한다.
दुःखानुशयी द्वेषः
duḥkha-anuśayī dveṣaḥ
‘두카-아누샤이 드베샤흐’
“진에란 자신의 불행을 외부의 환경 때문이라고 여기는 자기 파괴적인 습관이다.”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수련을 하지 않는 사람들의 특징이 있다. 화를 잘 낸다. 침묵수련과 명상은 출렁이는 자신의 마음을 잠잠하게 만드는 기술이다. 파탄잘리는 요가를 수련하지 않으면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출렁하는 잡념을 가만히 조용하게 만드는 훈련이라고 정의한다. 요가의 목적은 아름다운 몸매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생각, 말, 그리고 행동을 좌우하는 잡념들을 하나씩 제거하는 용기를 배양하는 것이다. 내가 자신을 가만히 응시해야, 그 요사스런 출렁임을 감지할수 있다.
인간은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 장본인이다. 수련하는 사람은 이 단순한 진리를 자신의 일상에서 수련하고 확인한다. 그러나 수련하지 않고 어제의 자신이라는 현상유지에 급급한 사람은, 타인과 환경이 자기 불행의 원인이라고 착각한다. 그가 일생동안 하는 일이란 ‘불평不平 늘어놓기’다. 그의 얼굴은 수심으로 가득 차 있다. 자기응시自己凝視는 그런 자신을 파괴하는 무기이며, 미래의 감동적인 자신을 구축하는 도구다.
인간은 이 응시를 통한 의도적인 선택으로 날마다 새로운 존재로 변한다. 만일 그가 육체의 욕망과 욕심의 노예로 전락하면, 그는 인간의 탈을 쓴 야만이며 심지어는 짐승과 다름없다. 요가수련자의 실력은 요가 메트 위가 아니라 일상에서 드러난다. 만일 그가 자신과 다른 생각을 지닌 사람의 의견을 존중하여 곰곰이 생각하고, 역지사지하는 언행을 한다면, 그는 진정한 수련자다. 나는 이 출렁이는 물결에 편승하여 화를 낼 것인가? 아니면 가만히 고요하게 만들어 내가 보고 싶은 나를 저 심연에서 건져 낼 것인가?
사진
<분노의 스틱스 강을 건너는 단테와 베르길리우스>
프랑스 화가 들라크루아(1798–1863)
유화, 1822, 189 cm x 241 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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