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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후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난 그리스도>
러시아 화가 알렉산더 이바노프 (1806 - 1858)
유화, 1835, 242 cm x 301cm
상트페테르부르크 러시아 박물관
2020.2.20.(日曜日) “매달리지 마라!”
(Lectionary Year C, April 17th, 2022)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마르다와 나사로의 죄 많은 여동생이다. 그녀는 자신의 눈물로 예수의 발을 닦고 값비싼 기름으로 그의 몸과 머리를 발랐다. 그 대신 예수는 그녀의 일곱가지 죄를 용서해준다. 그 후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의 열렬한 추종자가 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그녀는 후에 프랑스에서 선교하다 죽었다. 막달라 마리아는 그리스도교 역사를 통해, ‘죄 많은 여인’ 혹은 ‘창녀’로 폄하되어왔으나, 그리스도교 역사를 다시 쓴다면, 그녀가 수제자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가 십자가에서 처형당하는 순간 그 십자가 옆에서 울고 있었다. 이 중요한 순간에 그를 3년간 따라다니던 ‘남자’ 제자들은 모두 무서워 잠적하고 없었으나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가 숨을 거둔 그 끔찍한 장소에서 예수의 마지막을 지켜보았다. 이때 막달라 마리아 옆에는 마리아(예수의 어머니), 살로메 마리아(요한의 어머니), 글로바 마리아(야고보의 어머니)도 함께 있었다. 막달라 마리아는 그녀의 동료들과 함께 예수의 시신이 천으로 감겨 무덤에 안치되고 그 무덤의 입구가 커다란 돌로 닫히는 과정을 모두 지켜보았다. 이들은 예수를 따라다니며 그를 보살피던 자들이다.
네 개의 복음서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다른 ‘마리아’라는 이름의 여인들과 구분하기 위해 ‘막달라’라는 칭호를 붙였다. 헤롯왕의 부인 이름이 ‘마리암네’였기에 1세기 팔레스타인에서 왕비의 이름을 따라하는 전통이 있어, 당시 가장 흔한 여인의 이름은 마리아였다. 막달라라는 칭호가 갈릴리 바다 해변 마을 이름에서 왔다는 주장도 있으나 히브리어 ‘미그달’, 아람어 ‘마그달라’에 ‘요새/성벽’ 혹은 ‘위대함/훌륭함’이라는 의미가 있으므로 이를 영어로 번역하면 ‘Mary the Great’, 즉 ‘위대한 마리아’다.
마리아 막달라는 팔레스타인의 가장 흔한 이름 ‘마리아’로 출발해 ‘위대한 마리아’가 되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시간에 섬광처럼 등장해 모든 사건을 진두지휘한다. 그녀는 예수의 삶과 그리스도교 발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세 장면, 즉 예수의 십자가 처형, 예수의 장례, 그리고 예수의 부활의 순간을 모두 목격한 유일한 인간이다.
특히 부활의 순간에, 제자들의 부재는 ‘막달라 마리아’의 등장으로 대치된다. 네 개의 복음서 가운데 <누가복음>만 그녀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고 대신 “갈릴리에서 그를 따라온 여인들”로 표현한다. 그 후 요셉이 예수를 매장하는 장면을 목격한 두 여인은 바로 막달라 마리아와 또 다른 마리아인 야고보의 어머니다. 이 대목에서 <누가복음>은 다시 예수의 십자가 처형 장면 때 사용한 어구인 “갈릴리에서 그를 따라온 여인들”이라고 표현한다. <요한복음>서는 다른 복음서들과 달리 막달라 마리아 혼자 빈 무덤을 발견했다고 기록한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의 시신이 없어진 것을 알고, 한참 울었다. 그러다 다시 몸을 굽혀 무덤 속을 들여다보았다. 그러자 그 안에 흰 옷을 입은 두 천사가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한 천사는 예수의 시신이 놓여 있던 자리의 머리맡에 있었고, 또 한 천사는 발쪽에 있었다. 막달라 마리아가 본 이 천사들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성서에는 종종 천사들이 등장하지만 그들을 천사로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구약성서 <창세기> 18장에서는 아브라함에게 세 명의 천사가 나타나지만, 아브라함의 눈에는 그저 세 명의 나그네로 보일 뿐이다. 아브라함은 이들이 떠날 때까지 천사를 알아보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막달라 마리아도 이들을 천사로 인식하지 못하고 무덤을 지키는 동산지기로 생각했다. <요한복음> 저자는 이들이 천사였으며, 막달라 마리아는 처음에 그들을 알지 못했다고 기록한다. 두 천사가 막달라 마리아에게 묻는다. “여인아, 왜 우느냐?” 이 ‘여인’이란 명칭은 예수가 가나에서 혼인 잔치를 열었을 때, 그리고 십자가 처형 직전에 자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부르던 호칭이다. 영문을 몰라 하던 막달라 마리아는 두 천사에게 다시 묻는다: “누가 우리 주님을 가져갔습니다.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이렇게 말하고 두 천사에게서 돌아서자 두 명의 천사가 한 명의 예수가 되었으나 그 한 명이 예수인줄 인식하지 못했다고 기록한다. 그러자 부활하신 예수가 마리아에게 말한다. “여인아, 왜 울고 있느냐? 누구를 찾느냐?” 막달라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로만 알고 화를 낸다. “여보세요, 당신이 그분을 옮겨갔거든, 어디에다 두셨는지를 말해주십시오. 내가 그분을 모시겠습니다.”
예수는 도대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기에 3년 동안 그를 따라다니며 온갖 수발을 든 그녀가 왜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을까? 예수가 “마리아야!”라고 부르자 막달라 마리아는 깜짝 놀라 소리친다. 막달라 마리아는 눈이 아니라 귀로 예수를 인식한다. 그녀가 본 그 사람은 무덤을 관리하는 정원사였으나, 예수의 목소리를 듣고 그녀는 바로 그 정원사가 예수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래서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를 생전에 그를 부르던 명칭인 아람어 표현인 ‘라뽀니’ 즉 ‘나의 스승님!’이라고 부른다. 그러자 예수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λέγει αὐτῇ Ἰησοῦς Μή μου ἅπτου, οὔπω γὰρ ἀναβέβηκα πρὸς τὸν Πατέρα·
레케아 아우테 이에수스 메 무 하프투 우포 가르 아바베베카 프로스 톤 파테라
“예수가 그녀에게 말했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붙잡지 말라”
<요한의 복음서> 20.17a
위 문장의 의미를 해결해줄 결정적인 단서는 “메 무 하프투(me mou haptou)”에서 나온다. 동사 ‘하프투(haptou)’는 그 대상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알아보기 위해 손가락으로 ‘만지는’ 행위가 아니다. 하프투의 동사 원형인 ἅπτομαι(하프토마이)는 ‘대상을 휘어잡어 변형시키다’라는 의미다. 대상을 자신의 소유로 만들기 위해 손으로 적극적으로 휘어 감는 행위다. 하프투는 ‘하프토마이’의 특별한 명령형이다. 고전 그리스어 동사형에는 두 가지 명령형이 존재한다. 하나는 단순명령형으로 ‘지금 이 순간에 금지하는’ 명령형이다. 예를 들어 수업 시간에 떠드는 학생에게 선생님이 “떠들지 마”라고 한다면 이는 지금 이 순간에 금지시키는 명령이다. 그러나 고전 그리스어에는 또 다른 명령형이 있다. 이 명령형은 지속적인 명령형이다. 예를 들어 “거짓말 하지마라!”와 같은 것으로 이는 우리가 지속적으로 결심을 통해 지켜야 할 명령이다. 성서의 십계명은 모두 이 지속적인 명령형이다.
<요한복음> 저자는 바로 이 지속적인 명령형 ‘하프투’를 사용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를 단순히 떨리는 손으로 살짝 만진 것이 아니라 온힘을 다해 붙잡고 놔주지 않았다. 그래서 예수는 그녀에게 자신의 부활을 확인하도록 허락했지만 그녀가 본격적으로 매달리자 더 이상 “나에게 손대지 말아라!”라고 말한 것이다. ‘메 무 하프투’는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와의 특별한 관계를 전달한다. 막달라 마리아의 위상은 100년 전부터 발견되기 시작한 이른바 영지주의 문서들, 특히 <막달라 마리아 복음서>와 <빌립복음서>에서 더욱 확연히 드러난다. 이 영지주의 복음서들에서 수제자는 막달라 마리아다. 그녀는 오히려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에게 ‘하늘나라’의 비밀을 가르치는 수제자다.
‘메 무 하프투’는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했던 과거에 집착으로부터 벗어나라는 요구다. 복음서 저자는 부활한 예수가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구체적인 대상이 아닐 뿐만 아니라, 자신들에게 익숙한 과거의 모습도 아니라는 점을 말한다. 그 기억이 아무리 훌륭하고 감동적이었다 할지라도 자신이 집착하게 되면, 진부하게 되기 때문이다. 막달라 마리아에게 자신을 드러낸 부활한 예수는 인간의 상상을 뛰어넘는 새로운 모습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그것을 자신의 일상에 찾는 것이 신앙인들의 몫이다. “당신은 과거에 집착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새로운 부활의 흔적을, 일상에서 알아차리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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