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2020.12.8. (火曜日) “대담大膽”


사랑은 대담大膽이 만들어낸 선물이다. 정치 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1906-1975)는 ‘대담’을 이렇게 정의한다. “대담은 미래에 일어날지 모르는 일들에 의해 전혀 흔들리지 않는 완벽한 조용함이다. 대담에 어울리는 유일한 시제는 ‘현재現在’, 바로 ‘지금只今’이다.” 지금이라는 가치는 두려움을 제거하고 방지하는 처방전이며 사랑이라는 궁극적 감정을 만들어내는 용광로다.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을 통해, 자신만의 유일무이한 전설傳說을 써내려가는 인간을 작동하게 하는 마음가짐이다. 베트남출신 세계적인 명상가이자 평화운동가인 틱낫탄은 <공포: 폭풍을 통해 얻는 본질적인 지혜>Fear: Essential Wisdom for Getting Through the Storm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우리자신 안에 떨쳐낼 수 없는 거대하고 습관적인 공포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많은 것들을 두려워합니다.

우리의 죽음, 사랑하는 사람들의 상실, 변화 그리고 외로움.

마음 챙김 연습은 우리로 하여금 두려움을 제거하게 만듭니다.

오직 지금-여기에서 우리는 완벽한 안도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완벽한 행복입니다.

불교에서 연민, 자비, 공포, 슬픔, 절망과 같은 것들은 모두 마음작용입니다.

우리는 이것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것들은 변화가 가능합니다.”

변화는 그것을 간절하게 원하는 사람을 통해 일어난다. 자신의 삶의 변화를 원하는 사람은, 현재 자신이 처한 상황의 진부함을 자각하면, 그 진부함이 자신에게 끼칠 영향을 상상하여 두려워한다. 변화는 ‘의도적인 연습’을 통해서만 완성된다. 한 두 번의 도전이 아니라, 그 두려움을 사랑으로 변화시키는 지속적인 수련을 통해 서서히 변한다.

사랑하는 방법을 모르고 사랑하는 것은, 그(녀)가 사랑하는 사랑을 다치게 할 것이다. 사랑은 본능적인 감정의 토로나 반응이 아니라, 자신을 상대방과의 관계에서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능력이며, 자신의 선입견과 편견을 제거하고 상대방의 입장에서 자신을 보고 점검하려는 수고에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한 순간에 시작하여 마치는 폭력적인 동사動詞가 아니라 형용사形容詞다. 동사는 시작하고 마치는 시점이 존재하지만, 형용사는, 동사를 통해 얻는 상태의 지속이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라는 말은 “나는 너를 과거에 사랑하고 있고 지금도 그러며, 앞으로 그럴 것이다”라는 선언이다. 그 문장은 “나는 너를 사랑하는 상태에 있다”라는 의미다.

아렌트는 ‘사랑’을 그리스도교 교리의 기반을 놓은 북 아프리카 출신 성 어거스틴의 <고백론>을 통해 분석한다. 어거스틴은 “사랑하되, 당신이 무엇을 사랑하는지 주의하라!”라고 충고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랑하는 것이 곧 우리자신이며 우리자신이 되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은 사랑은 역설적이며 우리가 이 소중한 가치를 획득하고자 할 때, 심오한 지혜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어떤 대상을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굳건한 마음조차 비이성에 굴복시키기 때문이다.

아렌트는 어거스틴의 삶을 통해 두 가지 사랑을 언급한다. 첫 번째는 ‘그리움으로서 사랑’이다. 그리움(appetitus)이란 부족의 경험에서 시작하며 그리움을 일으키는 구체적인 대상과 연결되어있다. 그리움은 그 대상을 ‘선’으로 여기고, 그것을 획득하려는 운동이다. 만일 그(녀)가 그 대상을 획득하여 즐길 때, 끝난다. 이 획득은 ‘그리움’을 그것을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급속한 변질된다. 그가 그리움의 대상을 유지한다할지라도, 이전의 설렘과 기쁨을 점점 사라진다. 이 세상에서 안전하고 접근이 가능한 것을 추구하는 사랑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지상의 모든 것은 시간이 지나면 사라질 운명이기 때문이다. 아렌트는 <고백론>에서 어기스틴이 친구의 죽음에 대한 기록에서 사랑에 대한 새로운 방향을 감지한다. 어거스틴은 친구의 죽음을 자신의 죽음으로 여기고, 그 공포, 고통, 그리고 상실감으로부터 도망쳐, 자신의 내면으로 여행한다.

어거스틴은 자신의 내면에서 두 번째 사랑을 발견한다. 그것이 ‘기억’이다. 기억으로서 사랑은 그리움으로서 사랑과는 달리, 사랑을 가능하게 만든 절대 원인을 찾아 나선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 그 자체를 가능하게 만든 절대자를 떠올리며 감사한다. 어거스틴은 이 두 번째 사랑의 근원을 ‘신이 허락한 사랑에 대한 사랑’amor amoris Dei이라고 표현한다. 두 번째, 사랑은, 플라톤의 이데아 세계 안에 존재하는 변하지 영원한 사랑의 원형인 신에 대한 그리움이며, 어거스틴에겐 진정한 사랑이다.

아렌트는 이 두 가지 사랑의 차이와 실패를 지적한다. 그녀는 새로운 형태의 사랑을 제시한다. ‘아모르 문디’amor mundi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신에 대한 사랑은 동료인간에 대한 사랑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예수는 <마태복음> 22.37-40에서 신에 대한 사랑은 이웃에 대한 사랑이며, 이웃에 대한 사랑은 역으로 신에 대한 사랑이라고 말한다. 하늘과 땅 사이의 공간에서 사는 인간은, 이데아와 현실을 조합하는새로운 경지에서 사랑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마치 프랑스 화가 클로드 모네가 <수련睡蓮, 지는 해>라는 그림에서 그리려고 시도한 태양의 모습과 같다. 모네는 노망디 지베르니Giverny에 위치한 정적이 흐르는 자신의 연목에 드리운 분홍색과 노란색으로 어우러진 태양광선을 그렸다. 모네는 자신이 가진 연목에 빛의 깊이와 높이를 표현하였다. 그의 그림에서 우리는 두 세계를 응시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 순간과 이 장소에서 하늘의 태양이 지상의 연못에서 부활한 것이다. 신비하고 찬란한 태양빛을 확인하고 감상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는, 내가 꾸며놓은 연못에서 가능하다. 지금-여기는 저 너머에 있는 신의 흔적을 담을 수 있는 대담한 거울이다.

사진

<수련睡蓮, 지는 해>

프랑스 화가 클로드 모네 (1840–1926)

유화, 1907, 73,0 cm x 92,7 cm

런던 국립미술관




Comments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