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업의 발명이 도시, 문자, 예술, 그리고 종교를 탄생시킨 기반인가? 물질이 정신을 이끌지, 정신이 물질을 이끌지는 않는다고 믿는다. 그러나 최근 기원전 9500년에 건축되었다고 고고학적으로 증명된 터키 궤베클리 테페Göbekli Tepe에서 신전이 발견되었다. 지금 보아도 압도적이고 정교한 구조를 띤 신전이다. 이 발굴은 지금까지 인류 문화와 문명사의 ‘진리’로 여겨졌던 가정을 수정하는 결정적인 증거였다. 그것은 마치 천동설을 믿던 사람들이 지동설의 발견으로, 우주 안에서 자신의 위치와 세계관을 수정해야하는 중세인들의 심정을 이해하게 만들어준다.
그 당시 인류는 아직 농업 기술을 발견하지 못했다. 심지어 기술과 문화의 상징인 그릇초차 만들 능력이 없었다. 고고학자들은 조심스럽게, 인류문명에 대한 전혀 다른 시나리오를 제안하기 시작하였다. 궤베클리 테페에 사냥-채집인들은 자신들이 거주하는 거주지로부터 떠나 일정한 기간에 이곳에 순례巡禮를 와, 정교한 의례와 잔치를 벌였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의례를 지내고 잔치를 벌이면서, 자연히 정보를 교환하였고, ‘농업’이라는 새로운 생존방식을 상상하기 시작하였다. 간단히 말하자면, 종교가 농업이란 개념을 상상하는 기반이 되고, 농업은 다시 도시와 문자라는 문명을 탄생시켰다.
궤베클리 테베는 거대한 돌기둥들이 원형을 그리며 서 있는 유적지다. 그것은 외견상으로는 영국에서 발견된 스톤헨지와 비슷하지만 다음 두 가지 점에서 다르다. 첫째, 궤베클리 테페는 영국의 스톤헨지나 이집트의 피라미드의 건축시기와 비교하여 동시대가 아니다. 거의 칠천년 앞선 거석문화다. 둘째, 궤베클리 테페에 사용된 돌들은 자연석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 아니라, 거대한 석회암의 표면을 부드럽고 평평하게 직사면체로 다듬어, 사방에 수많은 동물들을 반부조물로 새겨놓았다. 야생 사슴, 뱀, 여우, 전갈, 그리고 야생 멧돼지를 새겼다.
인류는 기원전 9500년경, 가족 혹은 친족단위를 중심으로 소규모로 모여 살았다. 그들은 먹을 식물들을 채집하거나 야생동물들을 사냥하며 생존했다. 그런데, 궤베클리 테페는 사방에서 볼 수 있는 높은 언덕에 인위적으로 만든 신전이다. 당시 인류는 무게가 16톤이나 되는 돌을 바퀴나 동물의 도움도 없이 오로지 인력을 동원하여 이 높은 곳까지 옮겼다. 이들은 이 높은 곳에 특별한 건물, 일상과는 구분되는 신전을 건축하였고, 정기적으로 이곳을 찾는 순례자들이다. 이들은 아직 문자, 금속 혹은 도자기를 발견하지 못했다. 이들인 자신의 거주지를 떠나 이곳에 도착하면, 커다란 돌기둥이 거대한 거인처럼 그들을 압도하고, 그 위에 그려진 동물들을 낮에는 햇빛으로 밤에는 횃불에 의해 빛나, 영적인 세계에서 온 전령처럼 보였을 것이다. 어떤 고고학자는 궤베클리 테페의 건축을, 스위스 칼을 가지고 달나라에 갈 우주선을 제작하는 것과 비유할 정도로, 기적이라고 평가했다.
고고학자들은 아직도 궤베클리 테베를 발굴하고 있고, 그 기능이 무엇이지 가름하고 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 장소는 인간과 인간의 문명을 이해하는 기본 틀을 흔들어 놓고,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인간을 설명하고 있다. 20년전까지만 해도, 대부분 고고학자들은 호주출신 영국 고고학자 고든 비어 차일드Godon Vere Child가 주장한 ‘신석기혁명’의 이론을 수용하였다. 이 이론의 시나리오는 이렇다. 호모 사피엔스는 농업이라는 기술을 발명하여, 자신들의 과거 사냥-채집생활 그만두고 한 곳에 정착하여 마을을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상호간의 소통과 통치를 위해 신전과 계급제도를 만들고, 신전중심 경제의 원활한 운영을 위해 문자를 발명하였다. 농업혁명은 오늘날 이락 남부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 사이 어떤 한 곳에서 일어난 특이한 사건으로, 그 후에 인디아, 유럽으로 전파되었다. 학자들은 농업이 갑자기 등장한 이유는 빙하기가 끝나 기후가 좋아져, 사람들이 처음으로 식물을 지배하고 동물들을 키우기 시작했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진리’로 여겨졌던 ‘농업혁명’과 그 가정들은 궤베클리 테페의 발굴로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사실 과학에선 ‘정설’이나 ‘진리’란 있을 수 없다. 더 많은 지식을 위한 과정일 뿐이다. 더 정교한 이론이 등장하면, 이전에 정설도 수용된 것들은 거짓이 되고 만다. 고고학자들은 최근 이 이론을 수정하기 시작하였다. 농업의 등장은 혁명이 아니다. 농업은 여러 곳에서 수천년에 거쳐 자연스럽게 등장한 문화이며, 농업이 등장한 이유는 환경과 같은 외부의 조건이 아니라, 전혀 예상치 못한 우연한 발견이다.
궤베클리 테페는 인류가 아직 농업을 발견하기 전에, 모든 것을 동원해 건축한 최초의 순례지다. 후대 등장한 위대한 종교들은 신도들을 영적으로 훈련시키기 위한 순례지가 있다. 예루살렘, 메카, 바티칸,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었다는 부다가야가 대표적이다. 이 순례자들은 신앙의 수련을 위해 자신의 일상 거주지를 떠나, 먼 길을 걸어온다. 순례지엔 순례자들을 영적으로 고양시키기 위한 특별한 물건이나 구조물들로 가득 차 있다. 궤베클리 테베는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의 최초의 순례지다. 빙하기 시대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는 지하 동굴을 내려가 벽화그리기, 노래하기, 춤추기와 같은 다양한 예술 활동을 통해 의례를 행했다. 빙하기 시대가 끝난 후, 인류는 지하가 아니라, 자신들이 살던 지역에서 가장 높은 곳을 찾아 일상과는 구별되는 거룩한 구조물을 지었다. 인류는 처음으로 이 곳 궤베클리 테페에서 자신을 초월하는 세계를 희구하고 압도적인 건물을 지음으로 새로운 틀의 문화를 찾고 있었다. 이들의 하늘의 숭고함에 도전하는 웅장한 구조물에 대한 집착과 죽음 너머 세계에 대한 묵상, 그리고 자연과 동물에 대한 관찰이 인간에게 문명을 선물하였다.
클라우스 슈미트Klaus Schmidt란 고고학자는 1994년에 궤베클리 테베 근처에 있는 샨리우르파Şanlıurfa를 발굴하기 시작하였다. 샨리우르파는 고대근동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들 중에 하나로, 유일신종교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태어난 장소다. 슈미트는 샨리우르파 북쪽에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의 원류가 있는 산맥과 연결된 평원에서 신기한 지형하나를 목격하였다. 샨리우르파에서 14km 떨어진 평원에 갑자기 우뚝 선 언덕이 등장한다. 지역주민들은 이 장소를 다소 우스꽝스런 용어를 사용하여 ‘배불뚝이’의미를 지닌 ‘궤베클리 테베’라고 불렀다. 1960년대 이곳을 발굴한 미국 시카고대학 고고학자들은 궤베클리 테베를 비잔틴 시대 군사기지로 오판하였다. 슈미트는 1995년부터 이곳에서 발굴된 유물들이 훨씬 이전 인류문명의 기원을 밝혀줄 유물로 판단하고 독일 고고학 연구소와 샨리우르파 박물관 팀과 함께 본격적인 발굴을 시작한다. 그는 현재까지 이곳에서 원형으로 정교하게 배열된 돌기둥들을 단지를 20개나 발견하였다.
궤베클리 테베 건축자들은 자신들이 정성스럽게 건축한 원형 돌기둥을 시간이 지나면 흙, 도자기, 그리고 희생제사를 지낸 동물 뼈들로 매장하고, 그 위에 다시 원형 돌기둥들을 세웠다. 그래서 이곳은 점점 높이 쌓이게 되어, 마치 그 모양이 ‘배불뚝이’처럼 되었다. 또 다른 특징은 궤베클리 테베의 건축기술이 후대로 가면 갈수록 후퇴한다는 점이다. 가장 오래된 땅속 깊이 매장된 원형 돌기둥이 예술적으로나 기술적으로 월등히 뛰어나다. 이 기둥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작어지고, 단순해지고, 무엇보다도 섬세하지 않다. 궤베클리 테베는 기원전 8200년, 의도적으로 버려졌다. 그 후 완전히 폐허가 되어, 아무도 찾지 않았다. 궤베클리 테페는 어떤 장소였는가? 그리고 왜 사람들은 이곳을 버렸을까?
사진
<궤베클리 테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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