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2020.12.28. (月曜日) “비인야非人也”


인간이라면 차마 거절할 수 없는 자연스러운 마음이 있다. 측은지심이다. 우리는 인간이라면 차마 거절할 수 없는 자연스러운 마음이 있다. 측은지심이다. 우리는 불쌍한 사람을 보면, 그(녀)의 처지를 자신의 처지처럼 상상하고, 그가 그 불행한 환경으로 부터 탈출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거나, 더 나아가 그를 탈출하도록 애쓴다. 만일 내가 그런 불쌍한 사람을 보았지만, 못 본체 한다면, 그는 인간이 아니라 짐승에 가깝다.

승자독식을 찬양하는 현대문화와 문명은 점점 더 인간을 자기중심적이며 이기적인 동물로 전락시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 측은한 마음을 마비시켜왔다. 불쌍한 사람을 보면, 그(녀)의 처지를 자신의 처지처럼 상상하고, 그가 그 불행한 환경으로 부터 탈출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거나, 더 나아가 그를 탈출하도록 애쓴다. 만일 내가 그런 불쌍한 사람을 보았지만, 못 본체 한다면, 그는 인간이 아니라 짐승에 가깝다. 승자독식을 찬양하는 현대문화와 문명은 점점 더 인간을 자기중심적이며 이기적인 동물로 전락시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 측은한 마음을 마비시켜왔다.

교육은 인간의 측은지심에 대한 자극이다. 맹자는 모든 인간은 본래 착한 마음씨를 가지고 태어났다고 믿었다. 그는 한 나라의 지도자 갖추어야한 인격으로 이상적인 ‘왕도정치’를 제시하고 있지만, 사실 모은 인간들이 도달해야할 이상적인 품격이다. 그는 <공손추편公孫丑篇>에서 이렇게 말한다.

無惻隱之心 非人也 無羞惡之心 非人也 無辭讓之心 非人也 無是非之心 非人也.

(무측은지심 비인야 무수오지심 비인야 무사양지심 비인야 무시비지심 비인야)

상대방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으면 인간도 아니다.

악한 일을 행하고도 부끄러운 마음이 없으면 인간도 아니다.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을 사양하는 마음이 없으면 인간도 아니다.

옳고 그름을 구별하는 마음이 없으면 인간도 아니다.

맹자가 말하는 이 네 가지는 점점 감지하기 힘든 내용들이다. 내가 스스로를 조용히 헤아리는 노력을 경주하지 않으면, 깨달을 수 없는 진리다. 첫 째, 인간이라면 누구나 지니고 있는 자신의 처지보다 못한 사람들이나 동물에 대한 불쌍한 마음이다. 나는 내 주위에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그리고 심리적으로 불쌍한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나는 학대받는 동물들을 보고 모른 채하거나, 그들의 처지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나는 인간이 아니다.

둘째, 인간이라면 자신이 저지른 악한 일을 부끄러워 할 줄 알아야한다. 대부분의 인간이 그런 악행을 저지르고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가 있다. 그는 악과 선의 기준을 모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인간은 자신이 저지른 행위를 ‘선하다’고 착각한다. 자신의 편견과 이기심에 사로잡혀 행한 행위는, 언제나 악하다. 수양修養이란 그런 기준을 스스로에게 마련하는 조용한 삶의 혁명이다. 측은지심惻隱之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본성적으로 느낄 수 있는 감정이라면, 수오지심羞惡之心은 자신의 언행을 가만히 돌아보는 명상과 묵상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소중한 마음이다. 우리가 매일 신문이나 TV에서 보는 대부분의 지도자들에게는 찾을 수 없다. 그런 리더를 가진 사회나 공동체는 불행할 수밖에 없다.

악한 행위와 선한 행위의 구분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다. 선악의 기준은 내가 속한 공동체와 그 공동체를 넘어선 만인공동체가 정한다. 내가 저지른 행위가 선한 것이지 혹은 악한 것이지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내 자신을 제3자의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평가해야한다. 그것은 마치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매일 저녁 별도의 시간과 장소에서 자신을 3인칭으로 놓고, 그에게 당부의 말을 기록한 것과 같다. 그의 저작 <명상록>의 원래 제목은 그리스어로 ‘타 에이스 헤아우톤ta eis heautōn’이다. 이 제목의 의미는 ‘그 자신의 입장으로 들어가 당부하고 싶은 언행들’이란 의미다. 나는 악한 일을 의도적으로 혹은 본의 아니게 행하고, 그 악취가 나는 행위를 돌아보고 후회하고 다시는 그런 일을 행하지 않겠다고 스스로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면, 나는 인간이 아닌 짐승에 불과하다.

셋째는 두 번째 보다 더 감지하기도 어렵고 실천하기는 더욱더 난해하다.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을 거절하고, 내 자신의 삶에서 절제하는 삶을 능동적으로 실천하라는 충고다. 만일 내가 로또에 운이 좋게 당첨되어 많은 돈을 가지게 됐다고 가정하자. 나는 그 돈의 1/10정도를 선용할 수 있는 능력은 가진 자이기 때문에, 9/10는 나에게 행운의 시작이 아니라 불운의 씨앗이 될 수도 있다. 9/10는 그런 재화가 필요한 곳에 아낌없이 기부하는 것이, 나를 위해, 그리고 내가 속한 공동체를 위한 최선일 것이다. 자신이 누구인지 깊은 묵상을 통해 정확하기 파악하지 않는 사람에게, 인생은 소용돌이다.

타인이 좋다고 환호하는 것을 자신도 소유해야 행복하다고 착각한다.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 즉 사치는 그것을 소유한 자를 조금씩 불행의 늪으로 빠뜨린다. SNS의 광고는 시청자의 눈과 귀를 자극하여, 그 사람이 아닌 것을 자꾸 소유하라고 세뇌시킨다. 내가 아닌 얼굴로 변모,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 사치품을 소유하는 것, 나에게 과도한 음식을 섭취하는 것과 같은 행위는, 자기-자신을 찾지 못하고, 마음이 공허한 자들의 잠꼬대다. 사양은, 묵상과 절제를 오랫동안 수련한 사람의 몸가짐이다.

넷째는 옳고 그름을 구별하는 마음, 즉 시비是非를 가릴 수 있는 마음은, 궁극의 실력이다. 세상에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 우리는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야기하는 갈등을 보는데 익숙해져 있다. 그런 난장판이 오랫동안 한 사회에서 지속적으로 회자되면, 그 사회 공동체 일원들은 어느 순간에 한쪽 편에 서게 된다. 그런 후, 자신이 속하지 않는 다른 편에 대한 편견을 지니게 된다. 정의는 보편적이어서, 나에게도 옳을 뿐만 아니라 상대방에게도 옳은 어떤 것이다.

공자가 <논어: 위공편>에서 자공에게 건 낸 인생의 원칙이 있다. 자공은 자신의 마음 판에 새겨 삶의 원칙으로 삼을 만한 단어를 공자에게 요구하였다. 공자는 그것을 ‘서恕’라고 말했다. ‘서’란 타인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으로 수용하여 일시시키려는 노력이다. 공자는 ‘서’를 다음과 같이 풀어 말한다. ‘기소불욕물시어인己所不欲勿施於人’ 즉 자신도 원하지 않는 것을 상대방에게 강요하지 말하는 뜻이다. 옳음이나, 나의 편견 속에서 태어난 억지가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에서 헤아려, 새로운 생각을 떠올려, 상대방까지 감동할 수 있는 어떤 것이다.

사진

<어머니와 아픈 아이>

노르웨이 화가 크리스티안 크로그Christian Krohg (1852–1925)

유화, 1883, 48cm x 53 cm

오슬로 국립 예술, 건축, 디자인 박물관




Comments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