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2.27.(日曜日) “애간장”


요단강 서안 나블루스에서 유월절 행사의 하나로 어린 양을 대형 화덕에 굽고 있는 이스라엘인. 이들은 일주일간 누룩 없는 빵을 먹으며 유월절을 기린다. 유대 민중들은 세례요한이 죽고 나서 예수를 메시아로 생각하기 시작한다. 예수는 아직도 배를 타고 외딴 해변가에 정박해 있었다. 예수를 알아본 민중들은 그곳까지 몰려와 예수만 바라보았다. 급기야 예수는 배에서 내렸다. 이들은 왜 이렇게 예수를 따라다니는 것인가? 예수는 가난하고 절망적인 삶 속에서 한 줄기 희망의 빛을 찾으려는 이 불쌍한 사람들의 눈을 보았다. 그들을 보자마자 참수당한 세례요한이 생각나기도 하고, 목자가 없이 길을 헤매는 양과 같은 이들을 보니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예수의 눈에서 하염없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예수는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하루하루 연명하는 이들을 보고 그 처지를 예수 자신의 모습으로 생각했다. 측은한 마음, 즉 상대방의 마음을 내 마음으로 여기는 마음을 ‘컴패션’이라 부른다. 우리가 셰익스피어를 공부하는 이유는 나와 이해관계가 전혀 없는 영국인의 마음을 헤아려 그들을 내 자신으로 여기기 위해서다. 인간만이 이 ‘컴패션’의 범위를 다른 동물과 식물, 심지어 다른 행성까지 그 범위를 확대해왔다. 성인이나 존경받는 지도자의 특징은 바로 이 ‘컴패션’에 달려 있다.

무리들은 좀처럼 예수에게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해가 지가 불안한 제자들은 예수께달려와 <마테오복음서> 14.15-16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기는 외딴 곳이고 시간도 이미 늦었습니다. 그러니 군중들을 헤쳐 제각기 음식을 사먹도록 마을로 보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자 예수는 전혀 예상치도 못한 말을 한다. “그들을 보낼 것 없이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제자들은 예수를 이해할 수 없었다. 거의 2만 명쯤 모인 사람들을 먹일 식량이 어디 있다는 말인가? 제자들이 나름대로 먹을 것을 수집해 보니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었다. 예수가 무리를 땅에 앉게 하고 이것들을 들고 하늘을 우러러 기도했다. 예수는 먼저 제자들에게 그 일부를 주었고 제자들은 다시 이것을 무리에게 주었다. <마태오 복음서> 14.20-21은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주워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먹은 사람은 여자와 어린이들 외에 남자만도 오천 명 가량 되었다.”

이 이야기를 축자적으로 이해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 기적은 실제로 일어난 사건,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남녀노소를 2만 명을 먹였다는 사실을 역사적이거나 과학적으로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예수의 기적을 축자적으로 믿기 시작한 것은 서구에서 과학혁명과 계몽주의가 발흥한 이후 19세기 말부터 시작됐다. 성서의 역사를 보면 이미 2세기부터 성서에 문자적인 해석이 아니라 은유적인 해석이 도입되었다.

알렉산드리아의 신학자 오리겐은 성서는 다음 3단계 해석을 통해 깊은 의미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축자적 해석, 도덕적 해석, 그리고 영적인 해석이다. 오리겐은 축자적 해석을 이단의 해석이라고 주장한다. 한마디로 성서에 등장하는 이야기, 특히 기적 이야기를 축자적으로 믿는 것은 이단의 해석방법이라고 폄하한다. 두 번째 도덕적인 해석은 이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그 이야기를 자신의 삶에서 행동으로 옮길 것인가를 염두에 둔 해석이다, 오리겐은 도덕적인 해석은 초보 그리스도인들의 성서해석이라고 주장한다. 세 번째 해석인 영적인 해석은 그 이야기가 자신의 삶을 변화시켜 삶의 의미를 깨닫게 하는 해석이다.

오병이어(五餠二魚)로 5천 명을 먹인 기적을 축자적으로 믿는 사람들은 오리겐의 해석에 의하면 이단이나 무식한 자들이다. 심지어는 그렇게 축자적으로 믿는 것이 신앙인이라고 착각하는 사람이 많다. 두번째 해석은 초보 신앙인들의 해석인데, 오병이어의 기적은 물고기와 빵을 가져온 사람이 그 음식을 혼자 먹지 않고 다른 사람과 나누었더니 기적이 일어난다는 해석이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오늘날 우리의 행동강령을 알려주는 도덕적인 의미가 있다. 가진 자와 가난한 자의 간극이 점점 벌어지는 상황에서 가진 자들이 자신의 소유를 자신의 것이라 생각하지 않고 나눌 때, 그 사회에 기적이 일어난다는 가르침이다. 세 번째 영적인 해석을 시도해보자. 영적인 해석은 이 이야기를 각자의 삶에서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를 스스로 깊이 묵상하라는 요구다. 내가 가진 것을 나누는 것은 도덕적으로 옳은 일이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 삶이 나를 변화시키고 내 공동체를 지속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

예수의 기적을 이해할 수 있는 핵심단어가 있다. 그 단어는 <마태오 복음서> 14.14에 등장하는 그리스어 단어 ‘스플락흐니쪼마이σπλαγχνίζομαι’다. 이 단어의 뜻은 ‘측은하게 여기다’다. ‘스플락흐니쪼마이’는 ‘심장, 폐, 간’과 같은 내장기관을 의미하는 명사 ‘스플랑흐나’에서 파생된 동사다. ‘스플락흐니쪼마이’는 불쌍한 처지에 있는 사람을 보고, 그냥 지나치지 않고 그 대상의 고통을 자신의 온몸으로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사람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진귀한 현상이다. 그 아픔은 자신의 심장이 찢어지고, 애가 갈라지는 고통이다.

이 복음서 저자는 아마도 히브리어 단어 ‘라흐밈’raḥamim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를 찾다가 ‘스플락흐니쪼마이’란 단어를 떠올려 사용했을 것이다. 라흐밈은 생명을 탄생시키기 위한 장소인 모체의 자궁을 의미하는 ‘레헴reḥem’의 복수형이다. ‘라흐밈’은 아픈 자식의 고통을 보고, 자식의 아픔보다 더욱 고통스러워하는 어머님의 심정을 의미한다. 저자는 고전 그리스어, 특히 아테네 비극 시인 이스퀼로스와 같은 작가가 ‘분노’나 ‘사랑’과 같은 격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심정의 근원을 표현하는 ‘스플락흐니쪼마이’를 차용하여 변용시켰다. ‘스플락흐니쪼마이’는 복음서에서 상대방의 고통에 대한 즉각적인 연면과 자비를 뜻한다. 기적은 애간장을 태우는 연민이 만들어내는 예술작품이다.

사진

<오병이어의 기적>

야코포 틴토레토 (1519–1594)

유화, 1550, 154.9 × 407.7 cm (60.9 × 160.5 in)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