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2.24.(木曜日) “믿음”


우리가 어떤 사람이나 이데올로기에 대해 믿음을 가진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상대방에 대한 믿음을 가지기 전에, 그 대상에 대한 깊은 관찰과 탐구를 통해 믿음을 쌓아가다가 이 믿음이 지속되면 그것을 절대 신뢰하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우리가 흔히 믿음이라고 하면 근본주의자들의 믿음을 연상하게 된다. 특히 아브라함 종교들, 유대교, 그리스도교, 그리고 이슬람교는 자신들만의 신앙체계가 유일한 진리라고 생각하고 다른 종교들에는 구원이 없다고 배타적인 태도를 취한다. 심지어는 그리스도교안의 여러 전통들 가톨릭, 그리스정교회, 동방정교회, 그리고 개신교안의 전투적인 종파들은 상대방을 ‘이단’이라고 폄하하며 자신들이 신봉하는 교리만이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고 터무니없이 주장한다.

인간이 자신이 경험한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 안에서 세계관을 형성하고, 자신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처사를 ‘무식(無識)’이라 부른다. 우리는 이 무식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와 다름의 신비함과 아름다움을 알기 위해 공부한다. 이 공부는 단순히 학교에서의 공부뿐만 아니라 우리가 사는 자연의 오묘함,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에 대한 관찰을 통해 배우는 혜안을 포함한다. 자신들의 종교만이 진리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근본주의자라고 부르고, 이들의 폭력적이며 배타적인 주장으로 종교 전체가 그 위치를 상실하고, 개인적인 영성이나 치유를 강조하는 ‘쁘띠 심리학’으로 전락하고 있다.

인간의 생존은 절대적인 믿음으로 가능하다. 어린아이는 태어나면서 ‘어머니’라고 부른 존재를 절대 신뢰하게 된다. 그녀는 아이의 생존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다. 우리가 누구를 ‘믿는다’라고 하는 말은 단순히 ‘지적으로 그의 존재를 믿는다’라는 말이 아니다. 그런 의미로 사용된 적이 없다. 내가 어떤 신의 존재를 믿는다고 말로 고백해 천당에 가고, 그렇지 않으면 지옥에 가는 그런 저급한 차원이 아니다.

기원후 302년 가을 로마황제 디오클레티우스가 시리아의 안디옥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 당시 로마관원이었으나 그리스도교인이었던 로마누스가 로마황제를 위한 제사를 방해한 적이 있었다. 로마누스는 그 자리에서 체포돼 화형선고를 받았으나 디오클레티우스는 그의 혀를 자르라고 명했다. 디오클레티우스는 이 행동이 로마제국의 안정을 근본적으로 파괴하는 행위라 생각해 그리스도교인들을 박해하기 시작한다. 그는 약 10년간 로마제국의 동편에서 2만명의 그리스도교인들을 처형했다. 이 순교자들의 믿음은 자신의 목숨과도 바꿀 수 없는 삶의 존재 이유였다. 이 순교자들의 믿음으로 인류는 유럽문명과 세계문명의 기초를 닦았다. 예수가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다면 산을 옮긴다고 하지 않았던가?

믿음이란 무엇인가? 신약성서에 ‘믿음’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단어는 ‘피스티스pistis’이다. ‘피스티스’는 ‘어떤 교리나 사실을 믿는 행위’가 아니다. ‘피스티스’는 오히려 ‘신뢰·충성·최선·위임’이란 의미다. 예수는 자신이 신이라고 주장한 적도 없고 그것을 믿으라고 강요한 적도 없다. 그는 제자들에게 예수가 보여준 행동 ‘가난한 자들, 즉 고아, 과부, 그리고 이주자들’을 보살피고 배고픈 자들을 먹이고 헐벗은 자들에 옷을 주라고 주문한다. 또한 학연, 지연에 얽매이지 말고 자신만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버리고 하늘의 새나 들의 백합처럼 자연과 더불어 살며 생명의 신비를 마련하고 만물을 존재하게 하는 아버지-어머니 같은 존재인 신을 의지하라고 요구한다. 이렇게 살려고 결심하고 행동으로 옮기는 것, 그것이 바로 ‘피스티스’, 즉 ‘믿음’이다. 그는 이 ‘믿음’에 대한 기쁜 소식은 사회적으로 저명하거나 특권층뿐 아니라 창녀들과 고리대금업자들에 전해야 하며, 자신만을 위한 삶이 아니라 내 이웃을, 더 나아가 내 원수까지도 아낌없이 사랑하는 삶의 태도가 바로 ‘믿음’이라고 주장한다.

제롬(기원후 342-420년)은 그리스어로 기록된 신약성서를 로마제국의 공인된 종교로서 그 위상을 마련하기 위해 라틴어로 번역했다. 그는 ‘믿음’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명사 ‘피스티스’와 동사 ‘피스튜오’를 라틴어 명사 ‘피데스’(Fides)와 라틴어 동사 ‘크레도’(Credo)로 번역했다. 라틴어 명사 ‘피데스’는 영어단어 ‘피델러티’(Fidelity)와 마찬가지로 그 의미는 ‘약속에 대한 엄수·충실·(배우자에 대한)정절’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믿음’은 삶의 태도이자 어떤 사실을 믿는 정신적인 활동만이 아니다. 라틴어 동사 ‘크레도’(Credo)를 보면 그 원래 의미가 다시 한 번 강조됨을 확인할 수 있다. ‘나는 믿는다’라는 의미를 지닌 ‘크레도’(Credo)는 두 단어의 합성어이다. ‘크르’(cr-)라는 단어는 인도유럽어에서 ‘심장’이란 의미다. 영어에서 심장전문의사에 해당하는 Cardiologist와 어원이 같다. 고대로부터 ‘심장’은 그 사람의 ‘생각·말·행동’이 담겨져 있는 컴퓨터의 하드디스크와 같이 중요한 부분이다. ‘도’(do-)는 ‘우주의 질서에 맞게 삼라만상을 정렬하다’라는 의미다. 이와 같은 어원에서 파생한 단어가 ‘신’을 의미하는 그리스어의 Theos로 그 본래 의미는 ‘우주 천체를 질서에 맞게 배치하는 분’이란 의미다. 그러므로 ‘크레도’는 ‘우주의 질서에 맞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란 뜻이다.

우리가 흔히 교리(Creed)라고 하는 것들은 ‘말로 하는 고백’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의 삶을 근본적으로 조망해 우주의 질서가 무엇인지, 신이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탐구해 그 사람의 체취로 묻어나는 것이다. 라틴어 성서를 1611년 영어로 번역한 킹 제임스 번역본에서 Fides와 Credo는 각각 Believe와 Belief로 번역됐다. 당시 이 번역을 주도한 옥스퍼드학자들은 라틴어 Libido와 독일어 Liebe에서 그 의미를 축출해 이 단어들을 조성했다. ‘사랑’이라고 흔히 번역되는 독일어 Liebe는 ‘약속이나 의무로 엮여진 다른 사람에 대한 충성’이란 의미다. 영어의 Belief라는 단어가 17세기 후반, 계몽주의 시대로 진입하면서 ‘충성’이라는 의미에서 ‘가정 혹은 미심쩍은 주장에 대한 지적인 동의’로 그 의미가 변질됐다. 서구 그리스도교 용어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동아시아는 이 단어를 ‘신앙(信仰)’ 혹은 ‘믿음’이란 단어로 번역했다.

믿음은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나 불교의 사성제 팔정도를 말로 고백하고 믿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삶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을 깊은 묵상을 통해 알아내고, 그것들을 최선을 다해 심지어는 목숨을 바쳐 지키려는 삶의 태도이다. 11세기 철학자이자 신학자였던 캔터베리의 주교 안셀무스는 ‘Credo ut intelligam’이란 라틴어 명구를 남겼다. 직역을 하자면 ‘나는 이해하기 위해서 믿는다’인데, 그 의미는 ‘나는 인생에 있어 소중한 것을 묵상을 통해 찾아내고 그것을 지키려고 노력한다면, 그 결과 삼라만상의 비밀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정도 되지 않을까. 당신에게 목숨을 바쳐 지켜야 할 원칙, 아니 ‘믿음’이 있습니까?

사진

<캔터베리 성당 외벽에 있는 안셀름 동상>

오른 손에 Cur Deus Homo “왜 신은 인간이었나?” 책을 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