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2.23.(水曜日) “욕망의 자식들”


경전經典은 함축적이다. 그 안에 담겨진 단어들은 다양한 층위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성경을 그리스도교 경전으로 수용한 후, 그 경전의 완결성을 증명하기 위해 신학자들은 그리스-로마 수사학자들의 전통을 수용하여, 자신들의 교리와 사상을 알레고리allegory를 통해 개진하였다. 알레고리는 저자나 연설자가 자신의 생각이나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수단이다. 특히 복잡하고 심오한 사상을 일상의 용어를 이용하여 관람자. 독자, 혹은 청자들에게 전달한다.

저자들이나 연설자는 알레고리를 이용하여 숨겨진 혹은 복잡한 의미를 상징적인 인물, 행동, 이미지 혹은 사건을 통해, 자신이 전달하려는 의중을 분명하게 전달하려고 시도한다. ‘알레고리’allegory라는 영어단어는 라틴어 ‘알레고리아’allegoria에서 유래했다. 이 라틴어 단어는 궁극적으로 ‘숨겨진 언어’라는 의미를 지닌 ‘알레고리아’ἀλληγορία(allegoría)에서 왔다. ‘알레고리아’는 또 다시 ‘다른 언어를 이용하여’라는 뜻을 지닌 ‘알로스’와 ‘시장에서 대중에게 장황하게 설명하다’라는 뜻을 지닌 ‘아고레우오’ἀγορεύω (agoreuo)의 합성어다.

예수는 길거리에 있는 일반인들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말했으나, 제자들에게는 하늘의 비밀을 있는 그대로 전달했다. 그 이유는, 일반인들은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깨달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수의 함축적인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청자가 예수와 같이 지적으로 영적으로 고양되어있어야 한다. 예수는 대중이 자신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에, 장황하게 쉬운 예들을 이용하여 진리를 선포하였다.

이탈리아의 문화 단테는 중세 신학자들의 네 가지 경전해석 전통을 이어받아 자신의 저작에 적용하였는 그는 <칸그란데 델라 스칼라CanGrande della Scala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작품은 ‘다의多義’적이며 다음 네가지 의미를 지닌다고 말한다. 첫째, 축자적인 의미. 둘째 역사적 혹은 정치적인 의미. 셋째, 은유적이며 도덕적인 의미. 넷째 종말론적인 의미.

인도 최고의 경전인 <바가바드기타>BG에 수록된 단어와 문장도 은유와 비유로 함축된 언어로 가득 차있다. 특히 쿠루 들판에서 전투를 앞둔 두 진영을 대표하는 장군들의 이름은, 그 이름이 상징하는 가치를 상징한다. 쿠루왕국의 왕자 두르요다나는, 자신의 스승인 드로나가 이끄는 군대의 장군들을 다음과 같이 나열한다.

bhavānbhīṣmaś ca karṇaś ca kṛipaś ca samitiñjayaḥ

aśvatthāmā vikarṇaś ca saumadattir jayadrathaḥ

바반비슈마슈차 카르나슈차 크리파슈차 사미틴자야흐

아슈밧타마 비카츠나슈 차 사우마닷티르 차야드라타흐

(직역)

“당신과 같은 자들이다. 비슈마, 카르나, 크리파.

이들은 항상 전투에서 승리하는 자들이다.

아슈밧타마, 바카르나, 소마닷타의 아들, 그리고 자야르다타다.”

(의역)

“감각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내 군대의 장군들이다.

그들은 당신, 즉 ‘습관이자 내적인 성향’을 상징하는 드로나

자신만의 이익을 추구하는 비슈마,

집착을 상징하는 카르나,

사적인 망상을 상징하는 크리파,

잠재적인 욕망을 상징하는 아슈밧타마,

혐오를 상징하는 바카르나,

소마닷타의 아들, 즉 물질을 위해서 행동하는 카르마를 상징하는 부리슈라바스,

그리고 육체적인 집착을 상징하는 자야드라타다.”

물질적 욕망을 상징하는 두르요다나는 아르주나가 이끄는 군대의 진열을 보고 겁에 질린다. 그러나 이내 자신의 대장 드로나와 그가 이끈, 이전 전쟁에서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는 여덟 장수 이름을 열거하며 스스로 위로한다. 인간이 진선미를 추구한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몸의 쾌락을 보장해주는 물질을 숭배한다. 진선미를 추구하는 삶은 눈에는 보이지 않고 겸허와 인내를 통해 서서히 자신의 몸에 배는 아우라다. 그런 아우라를 무시하는 사람은 욕망과 욕망의 충족인 쾌락을 인생의 목표로 삼는다. 욕망은 서서히 그런 사람의 정신을 서서히 물들이고 영혼을 말살하여 결국, 그런 자의 주인이 된다. 과거에 경험한 쾌락에 탐닉하려는 성향은, 해탈을 통해 진선미를 추구하려는 결심을 좌절시킨다.

BG 1.4-6에서 언급한 판다바는 요가수련자가 해탈을 통해 신과의 합일을 시도할 때 필요한 삶의 원칙들이다. 8행에서 언급된 두르야다나가 이끄는 카우바다 군대는, 그 원칙을 좌절시키려는 욕심들이다. 파탄잘리는 <요가수트라> 1.24에서 요가수련자들이 궁극적으로 되어야한 신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한다: “신은 특별한 자신이다. 그(녀)는 요가 수련을 장애물들이나, 행위나, 행위의 결과나 잠재적인 성향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는다”. 요가수련자가 먼저 자신의 마음속에 오랫동안 자리 잡아, 습관이 되고, 자신이 된 욕심들을 체계적으로 제거해야한다.

위에서 나열된 여덟 장수들은 각각 인간의 내면에 각인된 번뇌煩惱들이다. 첫째 ‘드로나’는 윤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습관 혹은 내적인 성향이다. 인간이 무심코 한 생각, 말, 그리고 행위는 인간의 마음속에 잠재되어 있다가, 그(녀)의 전부를 아무도 모르게 장악한다. 드로나는 습관이 되어버린 내적인 성향인 ‘비파카’vipaka를 상징한다. 비파카는 ‘열매를 맺다; (기체나 고체를) 액체로 만들다’라는 뜻이다.

드로나는 과거의 생각과 행위가 의식에 인상을 남겨 동일한 것을 반복하게 만드는 강력한 성향을 만드는 습관을 의미한다. 드로나의 어근 ‘드루’dru-는 ‘고체가 녹아 액체의 상태로 남아있다’라는 뜻이다, <요가수트라> 2.12-13은 인간의 행위가 남기는 인상에 대해 이렇게 기록한다. “행위가 남긴 인상은 뿌리가 있다. 그 뿌리는 현재 드러날 수도 있고 적당한 환경이 되면 다음이나 미래 삶에 드러날 수 있다. 이 뿌리로부터 인간 탄생의 구체적인 조건들이 결정된다. 즉, 사람의 특징, 건강, 활력, 기쁨과 슬픔이 정해진다.”

두 번째 비슈마은 자기중심적인 이기심을 상징한다. 비슈마는, 개인으로서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 취해야할 자연스런 생존전략이다. 인간은 몸과 몸의 기관을 통한 감각과 행위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다. 비슈마라는 이름은 ‘놀라게 하다; 겁을 주다’라는 의미를 지닌 ‘비bī’ 혹은 ‘비슈bīṣ’에서 유래했다. 놀라는 행위는 외부의 강력한 자극으로 개인을 거부할 수 없는 상태로 돌입시킨다. 이기적인 비슈마는 영적인 자질들을 상징하는 판다바 군대의 가장 강력한 적이다. 영적인 자신을 구축하는 수련자들이 극복하기엔 버거운 상대다.

비슈마는 파탄잘기가 <요가수트라>에서 언급한 두 번째 번뇌인 ‘아스미타’asmita, 즉 ‘이기심’에 해당한다. ‘아스미타’는 ‘나는 존재한다; 나는 –이다’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 ‘아스미’asmi에 명사형어미 –ta가 접미하여 형성된 단어다. <요가수트라> 2.6는 ‘이기심’을 이렇게 정의한다. “이기심은 관찰자와 관찰의 수단을 동일한 것으로 여긴다.” 이 오묘한 문장은, 인간이 진정한 자아, 우주적인 자아, 그리고 신의 형상으로서 자아가 자신의 신적인 특성을 망각하고 자신의 몸과 정신을 통한 일시적이며 편견에 사로잡힌 불완전한 관찰을 동일시하는 오류다. 수련자는 자신이 정신(manas), 지성(buddhi), 그리고 생각(chitta)이라는 도구를 통해 사물을 인식할 수 밖에 없다. 수련자가 삼매경으로 진입하여, 자신의 생각을 약화시키고 급기야는 소멸하여, 진정한 자기-자신과 하나가 된다.

세 번째 용사 ‘카르나Karna’는 ‘행동하다’라는 의미의 동사 ‘크리’kṛi-라는 동사에서 유래했다. ‘카르나’는 쾌락을 안겨다주는 습관에 따라 행동하는 자다. 인간이 쾌락을 보장하는 행동들을 반복하고 집착한다. 카르나는 파탄잘리가 <요가수트라>2.7에서 언급한 세 번째 번뇌인 ‘집착’(raga)을 상징한다. 집착은 쾌락에 기생하는 성향이다.

카르나는 판다바 오형제의 이복동생이기도 하다. 쿤티가 이들의 어머니다. 쿤티가 판두와 결혼하기 전, 태양신 수르야의 이름을 불러 아들을 얻게 된다. 그 아들이 카르나다. 당시 쿤티가 아직 미혼상태였기 때문에, 카르나를 버렸다. 카르나는 한 전차를 모는 전사와 그의 아내가 입양하여 키웠다. 카르나는 두르요다나의 친구가 되어, 그의 요구에 동의하고 집착한다. 쿠르크세트라 들판에서 자신의 이복형제인 판다바 형제와 싸워야하는 운명에 처했다. 영적인 힘을 이끌어내는 힘의 상징은 쿤티는 인간의 육체를 지배하는 눈을 관장하는 빛인 태양을 통해 카르나를 낳았다. 카르나는 쿤티가 영적인 자아를 상징하는 판다바와 하나가 되기 전에 낳은 자식이기 때문에, 물질이 가져다 주는 쾌락의 유혹을 상징하는 두르요다나를 물리지치 못한다. 그는 두르요다나와의 친분을 통해, 물질적인 욕망을 위한 행위를 자신의 의무라고 착각한다.

네 번째 용사 ‘크리파Kripa’는 ‘상상하다’라는 의미의 동사 클리프klṛip에서 유래했다. 크리파는, 자신의 응시하는 대상의 실체를 깨닫지 못하고, 그 대상을 자신의 망상과 더 나아가 망상으로 정의하는 무식이다. 크리파는 파탄잘리가 언급한 첫 번째 번뇌인 ‘아비드야’avidya, 즉 ‘무식’에 해당한다. 크리파는 대상에 대한 잘못한 정보를 주어 정확한 이해를 왜곡하는 망상이다. 무식이란 ‘영원하지 않는 것, 불결한 것, 악한 것, 영적인 것이 아닌 것을, 영원한 것, 청결한 것, 선한 것, 그리고 영적인 것이라고 여기는 착각이다. 무식은 외부의 자극의 금방 경도되는 모든 번뇌의 기반이자 시작이다.

다섯 번 째 용사는 ’아슈밧타마‘다. 아슈팟타마의 은유적인 의미는 이 단어가 가진 산스크리트어 어근에서 찾을 수 있다. ās-va는 ‘저장된’이란 뜻이며 tthāman은 ‘서다’라는 의미의 동사 stā에서 파생된 단어로 ‘지속해서 존재하다’라는 의미다. 야슈밧타마는 오랫동안 축적되어 변하지 않는 것으로 한 생애를 마감해도 사라지지 않는 욕망, 즉 잠재적인 욕망을 의미한다. 파탄잘리는 이 잠재적인 욕망을 ‘바사나’vasana라고 지칭하고 <요가수트라> 4.10에서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이것은 시간이 시작된 이래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보편적인 원인이다.” 욕망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아슈밧타마가 상징하는 잠재적인 욕망과 다른 하나는 두르요다나가 상징하는 능동적인 욕망이다. 능동적은 욕망은 잠재의식과는 상관없이 감각의 자극을 통해 새롭게 일어나는 욕망이다. 욕망을 상징하는 두르요다나 군대는 이제 해탈을 상징하는 아르주나 군대와 전쟁을 치룰 작정이다.

사진

<알렉산더와 다리우스 3세의 전투>

이탈리아 화가 피에트로 다 코르토나(1596–1669)

유화, 1650, 173 cm x 375 cm

로마 카피톨리네 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