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2.2.(水曜日) “독재獨裁”



오랜만에 가평으로 돌아와 산책을 감행하였다. 산책길 강가에서 수달 한 마리를 보았다. 수달은 비석처럼 가만히 서서 나를 잠시 응시하더니, 이내 정신을 차리고 물가 건너편에 있는 야산으로 부리나케 도망쳐버렸다. 만일 내가 그 수달과 도망칠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서 맞닥뜨렸다면, 그는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나를 피해 도망치거나 심지어 나를 공격했을 것이다. 야생동물이 그런 행동을 하는 이유가 있다. 낯선 동물이 등장하여 자신의 자유自由를 저해했기 때문이다. 동물에게 자유는 존재이유다.

인간이 수 만년에 걸쳐 개와 고양이를 사육했지만, 이들은 틈만 보이면, 집밖으로 도망친다. 오랜 사육을 거쳐도, 그들의 자유본능을 완전히 제거되지 않는다. 그것은 새장에 갇힌 새가 기회만 있으면 날라 가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인간이라는 동물은 다르다. 자신의 자유를 아무리 구속당해도, 신체가 편안하고 약간의 쾌락을 즐길 수 있다면, 기꺼이 제한된 공간 안에서 타인이 정해 놓은 규율을 기꺼이 지킨다. 빵이 인간에겐 자유보다 본능적이고 매력적이다.

인간은 오랜 진화와 ‘문명생활’을 통해, 자유를 거세해왔다. 인간에게 문화와 문명이란 순응을 위한 일련의 장치들이다. 인류는 도시都巿와 도시를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소프트웨어인 문자文字를 발명하면서, 야만野蠻에서 문명文明으로 이동하였다. 야만은 한마디로 소통이 부재한 상태다. 혹은 소통을 유지할 정도로 남들에게 관심이 없다. 내가 원하는 욕심과 타인이 원하는 욕심을 중재할 매개체의 부족하다. 직계가족이나 일가친척들이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다른 사람과 경쟁한다. 그들에게 삶의 최우선원칙은 집단 내 ‘이익利益’이다. 타인과의 경쟁에서 자신들만의 이익을 보존하는 투쟁이 최고의 삶이다.

이들은 제한된 공간과 재원으로 자급자족하기가 쉽지 않았다. 타 집단만이 가지고 있는 자원을 사들이고 자신들의 특산물을 파는 교환 방식으로 생존을 도모하기 시작하였다, 인류는 일가친척을 넘어서 먼 친척까지 포함하고, 근처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도 혈연이상의 관계인 지연으로 뭉쳤다. 개인들은 자신들이 추구하는 삶의 방식이나 목적이 다르기 때문에, 갈등과 분쟁을 일으키기 마련이다. 무한한 공간을 지닌 새들이나 물고기, 혹은 끝이 없는 광활한 자연에 서식하는 동물들과는 달리, 인간은 사회적이며 경제적인 이유를 위해, 낯선 자들과 함께 사는 불편을 감수해왔다.

인류 최초의 법전인 수메르의 ‘우르카긴나 법전’(기원전 24세기)를 보면 수메르인들은 사유재산을 기록함으로 자신의 사회적인 지위를 확인하였다. 사람들 간의 법적인 분쟁이 있을 때, 이들을 중재할 공신력이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수메르인들은 그들을 ‘엔’EN이라고 불렀다. ‘엔𒂗’이란 쐐기문자는 원래 ‘의자’를 형상화한 모형이다. 통치자란 ‘의자’에 앉아 타인에게 판결을 내리는 사람이란 뜻이다. ‘엔’이란 용어와 더불어 이웃 부족들이 침공할 경우, 최전선에 투입되어 투쟁할 군사영웅이 필요했다. 수메르인들은 그런 영웅을 수메르어로 ‘루갈’LUGAL 즉 ‘큰 사람’이라고 불렀다. ‘루갈𒈗’이란 쐐기문자를 보면, ‘사람𒇽’의 머리 위에 ‘왕관’𒃲을 쓴 모습이다.

왕이 등장하면서 인간의 삶에 큰 변화가 있었다. 문명이전, 야만사회에서는 개인이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비교적 마음대로 추진할 수 있었다. 그들의 삶을 움직이는 것은 ‘자유自由’다. 자유란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를 스스로 찾아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왕 제도를 장착한 문명은 사람들에게 ‘안정安定’을 주는 대신 ‘충성忠誠’을 요구한다. 충성이란 사회나 국가와 같은 공동체를 위해, 개인 자유의 희생이다.

문명사회란 그 구성원들이 독립적인 인간으로 성장하는데 범위를 정한다. 안정과 자유는 배타적이다. 사회는 안정을 위해 일정한 자유를 포기하기를 약속한 시민들의 집합이다. 사회가 가장 선호하는 가치는 순응順應이다. 순응을 거역하는 자립自立을 시도하는 자는 공공의 적이 된다. 사회는 현실에 대한 직시나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창의적인 인간보다는, 그 구성원들이 토의하여 만들어낸 개념과 관습을 충실하게 따르는 인간을 선호한다.

순응은 계급사회에서 노예들의 특징이다. 16세기 프랑스 법률가이면서 철학자인 에티엔 드 라보에티Étienne de La Boétie (1530–1563)는 <자발적인 노예에 대한 논문>The Discourse on Voluntary Servitude에서 모든 정부는, 그 정부가 아무리 독재 국가라 할지라도, 대중의 지지가 없이 지탱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을 그들이 다스려야하는 대중에 비해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대중의 지속적인 인력과 자원 없이 통치를 불가능하다. 드라보에티는 그런 통치자를 뿌리로부터 자양분을 얻지 못하는 나뭇가지와 비교한다. 그러므로 독재는 ‘대중의 자발적인 예속隷屬’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요즘 리더들이 지지율에 일희일비하는 이유다. 만일 대중이 자발적인 예속을 반대하고 불응의 태도를 취한다면, 그 정부는 무너진다. 리더로 부터 통치권을 빼앗을 필요가 없다, 대중이 그에게 복종하지 않는다면, 리더는 금방 쫓겨난다. 대중은 적당한 리더에게 스스로 기꺼이 노예가 되어, 자유를 버리고 스스로 멍에를 씌운다. 드라보에티는 인간의 자발적인 예속을 ‘관습이라는 강력한 영향’때문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태어나, 우리에게 주어진 사회적이며 정치적인 조건에 익숙하기 위해 학습을 받는다. 그것은 마치, 야생이 아니라 동물원에서 태어난 동물이, 야생이 주는 자유에 오히려 당황하고 그곳에서 생존하기 힘들다.

고대 로마 황제들은 시민들을 정신적인 노예로 만들기 위해, 연극, 광대극, 호화로운 구경거리. 검투사, 전시, 경기, 전시 등 다양한 유흥거리를 만들어 냈다. 요즘 TV나 인터넷을 도배하는 쓸데없는 잡담들, 제약회사들의 무분별한 약 남용, 굳이 알지 않아도 될 특정인에 대한 선정적인 보도들이 대중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고, 21세기 독재자들은 우리를 점점 손안에 들어있는 핸드폰의 노예로 전락시킨다. 문제는 우리가 노예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사실이다. 국가는 선심성 사업으로 약간의 빵과 음료를 주지만, 그 돈은 대중으로부터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자유를 교묘하게 유린한다.

미국의 초월주의 사상가 랄프 왈도 에머슨은 <자립>라는 에세이에서 인간은 ‘넌컨포미스트’nonconformist, 즉 ‘불순응자不順應者’가 되어야한다고 주장한다. ‘불순응자不順應者는 ‘자신이 동의하지 않은 규율에 복종하지 않는 자’다. 그는 인간이 스스로 독보적이며 자립하는 인간이 되기 위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세상에 당신 마음의 고결함보다 거룩한 것이 없습니다.

스스로 외부로 부여받은 강요와 의무를 제거하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세상을 심판하는 투표권을 지닐 것입니다.”

인간에게 고결함은 무엇인가? 당신은 그것을 찾아보았는가? 당신은 고결함을 찾아 실천하는 자유인인가 아니면, 남들이 정해 놓은 규율에 순응하는 노예인가? 나는 누구의 장단에 맞춰 춤추는 꼭두각시인가 아니면 숭고한 자신을 찾아가는 순례자인가?

사진

<세금징수관>

네덜란드 화가 소小 피터 브뤼헬(1564–1638)

유화, 1640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학교 피셔 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