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2.14. (月曜日) “엑스트라”


첫눈이 내렸다. 어제 새벽부터 조금씩 내리기 시작한 눈이 아침에는 함박눈으로 변해 온 세상을 하얗게 덮었다. 인생의 동반자인 반려견들과 아침 산책을 나섰다. 대설주의보로 평상시 붐비던 북한산 산책길이 한적해 오히려 좋았다. 인생에 일어나는 일들은 언제나 가치중립적이다. 우리가 그것들을 대하는 태도에 따라 선이 되기도 하고 악이 되기도 한다. 더욱이, COVID-19이 가져온 역경은, 우리가 그것들 딛고 일어설 수 있는지를 평가하는 자연의 섭리이자 시험이다. 그런 시험을 극복하려는 의지와 인내가 없다면, 우리는 절망의 늪에서 신세를 한탄하며, 남을 탓하며 세월을 허송할 것이다. 우리가 이런 장애물을 도약의 발판이라고 여길 수 있는 안목과 지혜가 있다면, 절망은 오히려 희망의 시작이다.

COVID-19는 21세기 인류를 시험대에 올려놓고 어떻게 반응하지는 보고 있다. 우리는 이 시험을 통과하여, 새로운 문명과 문화를 창조할 것인가? 아니면, 그 소용돌이에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끝이 없는 심연으로 빠져 들어가 야만으로 들어갈 것인가? 이 첫눈이 내린 오늘, 공교롭게도 확진자 수가 처음으로 천명이 넘었다. 우리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상대와 경기를 치루고 있는 것인가? 그 수는 겨울이 도래하며 가파르게 늘고 있고, 우리 정부가 선-구매를 체결한 백신은 아직 임상실험을 완벽하게 거치지도 않았다.

우리는 망망한 바다 한 가운데서 암초에 부딪혀 침몰하고 있는 배에 승선한 탑승자의 심정과 같다. 구조요청을 받은 정부는 구조선을 신속하게 보낼 생각보다는, 자신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권력기관 마련에 여념이 없다. 정부와 같은 기관이 국민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을까? 용감한 개인은 자신이 아닌 어떤 기관이나 기구가 그(녀)의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거짓말을 믿지 않는다.

그런 개인은 움직이기 위해서는 멈춰야하고 멈춰야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안다. 하루는 칠흑과 같은 밤과 여명으로 시작한다. 산책을 다녀온 후, 공부방에 좌정하여 눈을 감는다. 오늘을 인생의 마지막처럼 살겠다고 다짐하고 외부에서 들려오는 소음들을 가만히 잡아본다. 용감한 개인은, 하루를 자기점검으로 시작한다. 자기점검이란,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들을 제거하는 행위다.

나는 10년 전쯤부터 아침명상시간에 ‘엑스트라-리스트’를 만들었다. ‘엑스트라-리스트’는 내가 하루를 상상하고 계획하면서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사항들의 목록이다. 하루는 이 엑스트라를 정교하게 제거할 때, 가장 만족스럽다. 나의 하루는 이 엑스트라는 제거한 후, 남아있는 그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가짐을 살피지 않고 무엇인가를 자꾸 하려한다. 그것은 모래위에 집을 건축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인생이란 집은 단단한 반석이 필요하며, 견고한 기반은 엑스트라는 제거할 때 슬며시 등장한다.

고대이집트인들은 나일강 범람이 물러간 후, 드러나는 첫 땅을 ‘벤벤’Benben이라고 불렀다. 혼돈을 물리친 마른 땅위에서 우주가 탄생한다. 피라미드는, 이 벤벤을 형상화한 건축물이며, 오벨리스크는 그 벤벤을 하늘 높이 들어 올려 하늘과 땅을 하나로 융합하려는 새로운 시도다.

엑스트라-리스트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주제는 발과 입에 관련된 사항들이다. 첫 번째 엑스트라는 발과 관련 있다. 내가 발을 디뎌 가는 장소를 가려서, 가야할 곳과 굳이 가지 않아도 될 장소를 구별하는 일이다. 가야만 하는 곳이라면, 그곳에 기꺼이 가서 타인의 말을 경청하고 감탄하며, 솔직하게 대화하기를 시도하였다. 체면 때문에 가야하는 곳이라면 사양하고 양해를 구했다. 두 번 째 엑스트라는 입에 관련되어있다. 말은 대부분 습관적이다. 어제까지 알고 있는 지식으로 자신을 과시하는데 사용하거나, 상대방에 창피를 주거나 굴복시키기 위한 도구인 경우가 많다. 말을 의도적으로 삼가는 침묵은, 내가 만들어야할 미래의 자신의 견지에서 나를 조용히 바라보아 변화를 요구하는 연민의 눈길이며, 내 말을 경청하고자하는 상대방에 대한 존경이다.

인간은 여느 동물과 달리 두 발로 서고 걷는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스스로 서서 걷기 시작한다. 인간이 육체적으로 자립하여 걷는다고 정신적으로 혹은 영적으로 자립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육체적으로는 자립하지만, 정신적으로는 누군가를 부러워하고 의존한다. 나는 홀로 의연하게 설 수 있을까? 인간은 독립적일 때만이, 자신만의 개성과 천재성을 발휘할 수 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독립적으로 서는 법을 거의 배운 적이 없다. 지연, 학연, 혈연에 의존하기 일쑤다. 자기 자신을 정의할 수 있는 내용물과 내공이 별로 없다 보니, 타인이 다 좋다고 하는 신용장을 얻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고, 그 신용장 뒤에 자신의 본모습을 감춘다. 이 신용장은 사실 나하고는 상관이 없는 ‘엑스트라’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좀 더 부연설명하자면, ‘나는 나에게 누구인가?’다. 그러면 나는 나에게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그 어떤 사람은 나아닌 다른 사람일수가 없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십년 후 자신의 모습’이어야한다. 누가 나에게 ‘당신은 누구입니까?’라고 묻는다면, 나는 ‘10년 후 나를 위해 수련중인 사람입니다’라고 말하고 싶다. ‘10년 후 나’는 현재의 나를 언제나 겸손하게 만든다. 그는 현재의 나와는 다른 사람일 수밖에 없다. ‘10년 후 나’는 오늘 나를 자발적이며 신명나게 만든다. 그런 나를 상상하고 조각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임무가 있다. 온전히 자기-자신에 대한 숙고를 통해, 나로부터 걷어내야 부스러기를 제거하기 때문이다. 본격적으로 기승을 부리는 COVID-19는 우리의 삶을 가장 간결하고 효율적인 체계로 창조할 것을 요구한다. 나는 그런 엑스트라를 정확하게 알고 있는가? 알고 있다면, 그것을 차근차근 제거하고 있는가?

사진

<원숭이들에게 위임된 국회>

반스키Bansky라는 예명으로 활동하는 익명의 길거리 예술가

스텐실작업, 2009, 2.5 m × 4.2 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