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분은 전체를 구성하기 위한 한 부분이자 전체이다. 그 부분이 부족하거나 생략되면, 온전한 전체가 될 수 없다. 100이라는 숫자는 1이라는 숫자를 반드시 포함해야한다. 1이 없는 100이란 있을 수 없다. 우주를 지탱하는 문법이 있다. ‘시간과 공간’이다. 인간은 시간과 공간을 떠나 존재할 수 없다. 시간이라는 그것을 시간이라고 인식하는 ‘순간’이다. 이 순간의 끊임없는 덩어리가 한 시간이며, 한 시간은 하루라는 집을 건축하기 위한 기둥이며, 하루는 한 달과 일 년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단위다. 순간의 연속이 일생이다. 마찬가지로, 한 인간을 규정하는 장소는 바로 ‘여기’다. 나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장소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여기’에 있는 나라는 존재를 구성하기 위한 준비였다.
시간과 공간이 나의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배경이다. 인간은 자신에게 한정적으로 주어진 시간과 공간 안에서, 의도적인 행위를 통해 자신의 삶을 의미가 있고 아름답게 만들려고 시도한다. 인간의 이런 인위적인 의도는 ‘원인’과 ‘결과’라는 법칙 안에서 전개된다. 인간에게 일어나는 행복과 불행은, 신의 장난으로 혹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생기는 사고가 아니다. 그것들은 자신이 과거에 뿌린 씨앗의 가감이 없는, 그리고 당연한 열매다. 저 들판에 우뚝 서있는 느티나무가 존재하는 이유는, 누군가 그 나무를 거기에 심었거나 혹은 느티나무 씨가 오래전에 그곳에 떨어져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다. 인과응보는 우주를 운행하는 문법이다.
개인이 도시이고 국가이며, 국가는 개인이다. 시민이나 국민이란 칭호는 조직적인 도시나 거대한 국가의 형태가 없는 일부분이 아니다. 개인은 도시와 국가의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사람들은 흔히 위대한 국가를 만들기 위해, 제도制度를 수정하려고 애쓴다. 제도가 국가를 위대하게 만들 것이라고 상상한다. 훌륭한 제도가 위대한 국가건설을 위해 필요하지만, 제도는 언제든지 바뀔 수 있는 소모품으로 영구적이지 않다. 위대한 국가는 위대한 개인들의 집합일 뿐이다. 위대한 개인들은, 국가라는 공동체를 위해 더 나은 생각과 경험을 지닌 개인을 기꺼이 따른다. 위대한 개인은, 그 자신이 위대해서가 아니라, 위대한 사상을 언제나 추구하기 때문에 위대하다.
기원전 7세기 소아시아(오늘날 터키) 에베소라는 항구도시의 철학자 헤라클리토스는 이제 막, 그리스 반도 아테네를 중심으로 문명을 일으킬 헬라인들에게 명언을 남겼다. 그는 ‘에토스 안쓰로포 다이몬’ethos anthropo daimon이란 그리스 문장에서 인간의 품격을 함축적으로 설명하였다. 이 문장을 번역하면, ‘개성은 인간의 천재성/운명이다’라는 뜻이다. ‘에토스’라는 말은 흔히 ‘습관’ 혹은 ‘윤리’라고 번역된다. 개인이 사소한 생각, 무심코 던진 말과 행동은, 무작위로 나온 것이 아니라, 그(녀)가 자신도 모르게 오랫동안 몸에 습득한 습관習慣이다. 우리는 이 습관을 그 사람의 ‘윤리’ 혹은 ‘도덕’이라고 부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그리스 비극의 수준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에토스’를 뽑았다. ‘에토스’는 그리스 비극에서 ‘등장인물’ 혹은 ‘배역’을 의미한다. 비극공연에 투입된 배우가 자신의 배역을 망각한다면, 그 연극은 실패하다. 무대 위에 등장한 배우들은 자신들이 맡은 배역을 충분히 숙지할 뿐만 아니라, 그 배역의 인물이 되어야한다. 만일 내가 소포클레스의 비극 <오이디푸스 렉스>에서 오이디푸스의 배역을 맡았으나, 그 역할을 망각하고 합창대의 일원으로 착각하여 노래한다면, 관객들은 야유를 보낼 것이다. 배우는 자신이 맡은 배역의 인물이 되어야한다. 자신이 만일 왕의 역할을 맡았다면, 그는 스스로 ‘왕’이란 무엇인가를 깊이 성찰하여, 자신의 말, 억양, 표정, 몸가짐, 목소리를 조절할 것이다.
개성이란 개인의 고유한 임무이며, 그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하려는 수고다. 헤라클리투스는 그런 개성인 인간에게 ‘천재성’ 혹은 ‘운명’이라고 정의한다. ‘다이몬’daimon이란 그리스 단어는 한 개인을 평범한 인간에서 위대한 인간으로 개조시키는 ‘천재성’을 지칭한다. 한 인간을 천재로 변모시키는 결정적인 요소는, 개인의 고유한 임무에 대한 인식과 그것을 완수하려는 몰입이다. ‘다이몬’은 또한 ‘운명’이란 의미도 가지고 있다. 헤라클리투스는 아테네에서 시작할 민주주의의 서광을 ‘개인의 개성이 천재성이며 운명이다’라고 예견한 것이다.
기원전 5세기 아테네를 중심으로 지식인들은 프로타고라스의 명언대로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고 선언하였다. 아테네인들은 하늘에 있을 법한 신전을 지상으로 가지고 내려와 파르테논 신전을 건축하였고, 신의 소유인 아름다움과 용맹스러움을 자신들의 손으로 만든 조각상으로 표현하였다. 아테네인들은 인간의 선한 면뿐만 아니라, 오랜 야만생활을 통해 자신들의 유전자 속에 존재하는 폭력과 비이성적인 본성을 과감하게 드러냈다. 그리스 비극작가들은 인간의 숨겨진 폭력, 특히 동료 인간에 대한 적대적인 본능을 과거의 ‘종교의례’가 아니라 그리스 비극경연이라는 ‘시민의례’를 통해 무대에 올렸다.
소포클레스는 아테네가 구축하려는 민주주의는 아테네 시민들 마음속에 존재하는 야만적인 폭력성을 제거하지 않는다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였다. 과거 왕정시대와 참주시대에는 왕이나 귀족들이 대대수 아테네인들의 인권을 무시하고 자신들의 이익만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기원전 5세기, 아테네인들이 왕정을 기초한 페르시아 제국과 마라톤 전쟁(기원전 490년)과 살라미스 전쟁(기원전 480년)을 거치면서 개인의 자유라는 고귀한 가치가, 새로운 시대를 구가하는 열쇠라고 신봉하였다. 그러나 아테네를 중심으로 한 델로스 동맹과 스파르타를 주축으로 한 펠레폰네소스 동맹 간의 전쟁(기원전 431-404년)을 통해, 아테네인들의 적은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은 자신들을 문명을 알지 못하는 야만적인 인간으로, 혹은 아테네를 민주주의가 아니라 독재로 타락시키려는 유혹의 궁극적인 원인은 개인아란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스 비극은 아테네의 시민교육과정이다. 이 시민교육의 내용은 ‘연민’이다. 아테네인들은 무대 위에 올라선 장님 오이디푸스를 응시하고 있었다. 이오카스테는 자신의 남편인 줄만 알았던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아들인 사실을 알고 자살한다. 오이디푸스는 어머니의 옷에서 빼낸 브로치로 자신의 눈을 찔러 장님이 되었다. 아테네시민들은 그런 비참한 운명에 처한 오이디푸스를 보고 가만히 눈물을 흘린다. 그가 천륜을 어린 인간이지만, 오이디푸스가 처한 상황으로 들어가, 상상하기 시작한다. 아테네시민들은 오이디푸스가 불쌍해서 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오이디푸스가 되어, 우는 것이다. 그들은 무대 위에 서 있는 자신들을 보고 울고 있었다.
이 순간을 고대 그리스어로 ‘엑스타시스’ekstasis라고 부른다. 흔히 ‘황홀경’이라고 번역되는 이 단어는 ‘자신의 현재(스타시스)에서 빠져나온(엑스) 상태’를 의미한다. 인간은 동료인간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느낄 때 성장한다. 다양한 인간들이 거주하는 아테네에서, 다른 인간에 대한 연민은 아테네문명과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힘이었다. 소포클레스는 위대한 개인이 아테네 민주주의를 완성한다고 믿었다. 위대한 개인이란, 무대 위에서 울고 있는 배우, 더 나아가 무대에서 울고 있는 자신을 응시하고 불쌍하게 여기는 연민의 소유자다. 위대한 개인은 자신을 제3의 눈으로 응시하는 자이며, 자신의 잘못을 성찰하는 개인이다. 민주주의는 자신을 성찰하는 위대한 개인들이 모여 만드는 예술작품이다.
사진
<헤라클리투스>
네덜란드 화가 헨드릭 테르브루그헨(1588–1629)
유화, 1628 , 85.5 cm x 70 cm
암스테르담 국립박물관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