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時間은 순간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흐름에 대한 인위적인 구분으로 자신이 간절하게 원하는 일을 위해 몰입하는 ‘구별區別된 시간’과 그렇지 않는 ‘태만怠慢한 시간’으로 나뉜다. 구별된 시간은, 자신이 흠모하는 목적을 위해 정성스럽게 정한 임무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헌신하는 거룩한 시간이다. 그 시간 안에서는 순간이 영원이며 영원이 순간이다. 구도자는 영원이 된 순간에서, 무아를 경험하여 우주와 하나가 된 자신으로 승화하여, 저 높은 하늘에서 정진하고 있는 자신을 연민의 눈으로 보며 격려한다. 그(녀)가 거주하는 장소가 예루살렘이며 그녀가 보내는 시간이 천국이다.
구별된 시간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소용돌이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줄도 모르는 어리석은 자다. 태만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하루 안에 자신이 완수해야할 임무를 모르기 때문에 태만하다. 그것은 마라톤이라는 경기에 참가였지만, 자신이 마라톤을 완주해야하는 이유를 모르거나, 자신이 정한 결승점을 아직 찾지 못한 자다. 그러기에 그에게 시간은 아깝지 않다.
그리스도교를 그리스-로마세계로 전파하여 팔레스타인 종교를 세계 종교로 탈바꿈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도바울이 삶의 말년 61-63년 로마의 감옥에서 기록한 옥중서신인 <에베소서>에서 구별된 시간을 활용하는 방법을 5.15-16에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Βλέπετε οὖν ἀκριβῶς πῶς περιπατεῖτε,
μὴ ὡς ἄσοφοι ἀλλ’ ὡς σοφοί,
ἐξαγοραζόμενοι τὸν καιρόν, ὅτι αἱ ἡμέραι πονηραί εἰσιν.
“자, 보십시오. 여러분은 심사숙고하여 걸어야합니다.
지혜가 없는 자가 아니라 지혜로운 자로서 걸어야합니다.
그 구별된 시간을 최대한 살려야합니다.
왜냐하면, 세월은 무가치한 고통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을 이 문장을 ‘보라’는 의미를 지닌 그리스어 동사 ‘블레포βλέπω’로 시작한다. 블레포는 단순히 보는 행위가 아니다. 이 동사는 관찰을 넘어, 핵심을 꿰뚫어 보는 통찰洞察을 의미한다. 블레포는 눈으로 보지만, 그 대상이 함축하고 있는 영적인 의미를 파악하는 행위다. 그러기에, 사람은 심사숙고하게 된다.
‘심사숙고’란 번역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아크리보스’ἀκριβῶς는 ‘마지막 점’ 혹은 ‘목적지’를 의미하는 ‘아크로스’akros에서 파생된 부사도, 먼 미래의 시점에서 바라보아 지금의 언행을 결정하는 정확성과 섬세함이다. 바울은 우리의 심사숙고의 대상은 거대한 철학적 담론이나 종교적인 교리가 아니라, ‘나의 걸음’이라고 말한다. 하루를 마지막 날처럼 사는 사람은, 자신의 한 걸음 한 걸음이 인생의 처음이자 마지막이기 때문이다.
그런 시간은 양적인 시간이 아니라 질적인 시간인 ‘카이로스’다. ‘카이로스’는 신이 개입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으로 금방 사라져 버리는 ‘기회機會’라고 번역할 수 있다. 기회는 한번 뿐이 때문에, 그 시간을 포착하면, 내가 할 수 있는 행위는 ‘나의 모든 재산을 거는 대담함’이다. 그리스어 ‘엑사고라쪼’ἐξαγοράζω는 시장(아고라)에서 아무도 알지 못하는 보물을 발견하여, 그 물건을 자신의 전 재산을 주고 용감하게 사는 행위를 이르는 부사다. 만일 내가 그럼 기회를 놓친다면, 세월은 태만해져, 고통으로 가득할 것이다. 고통이란 가치가 있는 고귀한 일을 찾지 못했을 때, 나를 엄습하는 게으름이다.
현대인에게 하루는 리더라고 뽑은 리더들이 사실을 욕심으로 가득 차 자신의 불행을 자초하는 허무맹랑한 짓으로 가득한 뉴스들, 굳이 구입하지 않아도 될 물건들을 계속 사라고 세뇌시키는 쇼핑방송, 선정적인 내용으로 눈과 귀를 유혹하는 U-Tube 영상, 그리고 쉴 새 없이 울리는 핸드폰 벨소리와 알림소리로 가득 차있다. 현대인들의 불행은 자신들이 태만한 시간을 보내는 줄 모르는 무식이다. 인간은 자신이 투자한 회사의 주식이 널뛰기하는 것을 걱정하지만, 온전히 자신을 자신답게 만드는 사간에 대해서는 태만하다. 나는 오늘이란 시간을 최선을 다해 살렸는가?
사진
<사도 바울>
렘브란트 (1606–1669)
유화, 1657, 131.5 x 104.4 cm
워싱턴 국립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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