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1.9.(月曜日) “어린아이”


변화는 동사가 아니라 형용사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상태 동사다. 변하는 능동성은 동사이고, 변화를 유지하여, 변화 중에 있다는 사실은 상태이기 때문에 형용사도 표현할 수 있다. 나는 지금-여기에서 변화하고 있는가? 나는 그 변화의 주체이자 그것을 관찰하는 객체인가? 독일철학자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동물 상태의 인간이, 변화를 희망하여 그것을 시도할 때 거치는 세 단계를 말한다, 그는 후회가 없는 삶을 살기 위한 영적인 변모의 과정을 동물의 특징을 비유하여 설명하였다. 낙타, 사자 그리고 어린아이다.

문화와 문명의 혜택으로, 자기개선의 욕망이 있는 자는 낙타, 사자, 그리고 어린아이 순으로 변화하고 승화한다. 이 순서는 승화를 지향하는 나의 분투이기도 하다. 첫 번째, 나는 ‘낙타’였다. 낙타는 욕심을 내, 더 많은 지식과 지혜를 순진하게 추구하는 인간을 의미한다. 인간은 필연적으로 낙타다. 진리가 무엇인지, 후회가 없는 삶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세상에서 가장 무겁고 버거운 지식과 혜안으로 등에 짊어지고 사막을 건너기 위해 한 걸음 한 걸음 무거운 발굽을 든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빌어 첫째인간, 낙타 인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무엇이 무겁습니까?

무거운 짐을 진 영혼이 묻습니다.

그것은 낙타처럼 무릎을 꿇고 자신의 등에 무거운 짐을 올리는 것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니체는 낙타 영혼을 지닌 인간을 무거운 짐을 올리는 자, 돈, 명예, 권력을 쫓는 자라고 말합니다.

“낙타는 묻는다:

무엇이 가장 무거운가?

내가 그 짐을 올려놓고 나의 힘을 자랑할 것이다,”

<차라투스트라> 54단락

낙타는 무거운 짐을 지고 사막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짐을 진 인간은 자신의 짐이 버거운지도 모르고 습관적으로 짐을 지고 하루하루 산다. 시간이 지나면 그 짐의 무게는 비탄, 절망, 그리고 복수심으로 변한다,

둘째 인간은 사자다. 인간이 낙타로 인생의 사막을 건너다, 지키면, 두 번째 변모의 순간을 맞이한다. “인간의 영혼은 사자가 된다. 그 영혼은 자유를 만끽하고 싶고 사막의 주인이 되고 싶어 한다.” (<차라투스트라> 54단락) 지식의 축적을 통해 지혜를 얻는 노예에서 벗어나, 내가 누구인며, 내가 내 자신이 되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한다.

사자가 된다는 것을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자는 “나는 -을 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사자의 삶의 방식을 의지다. 낙타가 사자가 되면, 남들이 부과한 짐을 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임무를 찾아, 그것을 행한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자신의 임무가 된다. 그러나 사회는 그런 사자인간을 가만히 두지 않는다. 사자는 용을 만난다. 사회의 규범과 관습을 의미하는 용은 “너는-을 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사자는 용과 만나 세계관과 도덕관을 두고 결투를 벌인다. 찰스 다윈은 이 기나긴 싸움을 ‘손톱과 발톱이 피로 물든’red in tooth and claw라고 표현하였다.

사자는 행복하지 않다. 그래서 세 번째 단계의 변모가 등장한다. 사자는 이제 ‘어린아이’가 된다. ‘성숙成熟’이란 놀이에 몰입하고 있는 어린아이의 정색正色을 재발견하는 것이다. 이 정색이 그녀를 행복하고 건강하고 부유하게 만들 것이다.

니체는 이 세 번째 변모단계인 ‘어린아이 영혼’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린아이는 순진, 망각, 새로운 시작, 놀이, 스스로 돌아가는 바퀴, 거룩한 긍정이다.”

<차라투스트라> 55단락

어린아이가 된 사자는 더 이상, 자신의 의지로 ‘무엇을 할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놀이를 즐기는 어린아이처럼, 영혼은 자신의 의지를 조용히 행할 뿐이다. 자신의 세계를 조금씩 창조할 뿐이다.” 삶은 더 이상 외부의 힘과의 대결이 아니다. 삶은 자신의 힘의 발휘이며 만족이다. 니체의 깨달음은 이미 오래전 영지주의 문헌 <도마복음서>와 그리스도교 문헌 <마태복음>에서 선포되었다.

<도마복음서> 어록 4는 다음과 같다.

“예수가 말했다:

“나이 많은 사람이 인생의 위치에 대하여

태어난 지 칠일된 어린아이에게 질문하기를 망설이지 말라.

그러면 그는 살 것이다.

왜냐하면, 먼저 된 많은 자들이 나중 된 자들이 될 것이며,

그들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 난해한 문장은 무슨 뜻인가? 여기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이제 두발로 걷기 시작하고 말하기 시작한 유아를 의미한다. '유아'를 의미하는 콥트어 단어 ‘쉐레-쉠’ 의 축자적인 의미는 ‘작은 아들’이란 뜻이다. 유아는 이 세상에 요구하는 것에 물들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이 어디에 있든지 그 곳의 중심이 된다. 그 이유는 눈치를 보지 않기 때문이며 체면 때문에 행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태어난 지 칠일밖에 되지 않는 어린 아이는 아직 이름도 없고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는다. 그와 같은 영혼은 자신이 원하는 것에 몰입한다. 인생의 경륜이 쌓은 나이들은 지혜로운 자가 유아에게 인생의 의미를 묻는다는 것은 어리석은 처사처럼 보인다. 유아는 말을 할 수 없고 한 곳에 집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유아’란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순수하고 정결한 ‘위대한 자기-자신’이 될 수 있는 거룩한 씨앗이다. 그 씨앗은 나의 마음 속 가장 깊은 곳에 은닉되어 발견되기를 바라는 위대한 자신이다. 나이가 많다고 지혜로운 것은 아니다. 늙은이는 자기 마음속에서 그(녀)를 조용히 부르고 있는 ‘작은 아들’로부터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지 묻고 들어야한다. 그는 세파에 시달려, 자기 영혼의 지혜를 듣지 못하고 보질 못하는 귀머거리-장님이 되었다. 나이는 들었지만, 자신이 왜 세상에 태어났는지 알지 못한다.

‘난지 칠일된 아이’라는 표현은 유대교 관습 할례와 깊은 관련이 있다. 할례는 칠일이 지난 팔일째 되는 날 유대인 남자아이에게 행해지기 때문이다. <도마복음서> 어록 53에 의하면 할례는 무의미한 관습이라고 단정한다. ‘난지 칠일된 아이’는 창세기 1장에 등장하는 신이 창조한 완벽한 세계를 의미할 수도 있다. 7일 동안 세계를 창조한 세계는 바로 ‘신의 형상’Imago Dei이였기 때문이다. 여섯째 날에 인간, 아담을 창조하고, 일곱째 날에 신이 안식하여 7일 만에 우주와 그 내용물이 완벽하게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일상적인 시간인 크로노스를 사는 사람이 산 시간을 헛되기 때문이다. 지혜의 모델로 어린아이는 복음서에도 종종 등장하는 개념이다. 사람들이 우주의 시작시간과 첫 창조의 시간, 신와 인간이 만나는 시간인 카이로스로 돌아가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이런 발견은 인간이 매기는 시간과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예수도 <마태복음>에서 18.1-3에 우주의 비밀을 어린아이에게 알려주었다고 말한다.

1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물었다. “천국에서는 누가 위대합니까?

2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웠다.

3 그리고 말했다.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다.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이 마지막 문장에서 돌이킨다는 것은 회개한다는 의미이며, 깨우친다는 말이고, 깨달음의 경지에 들어간다는 선언이다. 어린 아이과 같은 몰입, 자신이 간절히 원하는 한 가지에 몰입하는 정색이 그를 천국으로 입장시킬 것이다. 과연 나는 “낙타인가, 사자인가, 아니면 어린아이인가?”

사진

<놀이하는 어린아이들>

영국화가 해리 브루커 (1848–1940)

유화, 1890, 71.5cm x 91.9cm

런던 가정박물관Museum of the Ho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