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1.4. (水曜日)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고갱은 19세기 후반에 세잔과 고흐와 함께 혜성처럼 등장한 위대한 화가이다. 그는 처음에는 잘나가는 주식 중개인이었다. 그러나 취미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자신의 존재의미를 발견하였다. 그는 항상 그리스도교의 이상적인 삶을 행동으로 옮기려고 노력하였고 35세가 이르러 자신의 사업과 심지어는 가족까지 포기하고 예술가로서 파란만장한 삶을 시작한다.

그는 프랑스 제3공화정(1870~1940) 시대에 살았다. 당시 프랑스 지식인들의 철학은 실증주의(혹은 긍정주의positivism)였다. 실증주의란 종교적이며 형이상학적인 사변을 배격하고 인간의 오감이나 실험으로 증명 가능한 지식만을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기는 철학사조이다. 실증주의는 자연과학의 방법과 성과에 열광했고, 사회도 그러한 과학적인 방법론을 통해 분석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이 당시 ‘사회과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이 생겨났다.

고갱은 당시 프랑스 지식인들의 우상이 된 실증주의, 그리고 그 안에 기생하는 이기심과 물질주의를 통해 서양의 문명은 파산직전에 이르렀다고 진단했다. 유럽문명의 중심이자 세계문명의 중심인 파리에서 자신과 같은 이상적인 예술가가 살아남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파리를 떠나 프랑스 북서부 지역인 브르타뉴나 남태평양 타히티로 이주한 이유는 그가 단순히 도시 문화를 떠나는 것뿐만 아니라 독창적이지 않은 예술세계를 떠난다는 것을 의미했다. 고갱에게 “원시적”이 된다는 의미는 문명에 의해 물들지 않은 예술을 구축할 수 있는 자격을 얻는 것이었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는 고갱이 일생동안 집착했던 질문들이다. 고생은 이 그림을 완성한 후, 다행인지 불행인지, 자살에 실패하고 6년을 더 산다. 고갱을 일생동안 수많은 작품들을 남겼지만, 이 작품은 그의 인생에 관한 깊은 통찰력과 철학이 담긴 최고의 대표작이다. 이 질문은 성서에 등장하는 첫 번째 질문인 <창세기> 3장 9절에 언급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에 대한 해설이다.

예술비평가들은 오랫동안 고갱의 삶을 분석하여 그의 성격과 철학에 대하여 좀 더 잘 알려고 시도하였지만, 모두 실패하였다. 오늘날 고갱이란 천재화가는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고갱은 이 그림은 오른쪽에서 시작하여 왼쪽으로 관찰해야하며 그림의 왼편 상단에 세 개의 질문들이 프랑스어로 적혀있다. D‘où Venons Nous, Que Sommes Nous, Où Allons Nous. 이 세 질문들을 번역하자면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이다.

이 세 질문에 대한 내용과 대답을 화폭에 오른쪽부터 차례로 담았다. 이 질문은 <창세기> 16장 8절에 등장하는 신이 하갈에게 한 질문과 유사하다. 신이 선택한 아브라함의 딜레마는 부인 사라가 불임여성이라는 점이었다. 신의 역사를 펼치기 위해서는 자식을 낳아야하는데, 그 원천의 길이 막힌 것이다. 그러자 사라는 자신의 몸종 하갈을 아브라함에게 주어 임신하게 하였다. 아브라함이 임신한 하갈을 너무 좋아하여 사라는 질투심에 하갈과 그 자식을 사막으로 내쫓은 것이다.

하갈은 임신한 몸을 이끌고 사막으로 도망하는 중이었다. 낮에는 물 한 방울도 발견할 수 없는 사막에서, 밤에는 들짐승이 우글거리는 사막에서 하갈은 자신이 어디로 가야하는지 몰랐다. 그 때 천사가 등장하여 하는 질문이 "사래의 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길이냐?"이다. 천사가 하갈에게 한 질문을 자세히 보면 두 질문이다. “너는 어디서 왔느냐?”와 “너는 어디로 가느냐?”이다. 이 질문들은 신이 <창세기>에서 질문한 첫 질문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와 두 번째 질문,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와는 사뭇 다른 질문이다.

고갱은 이 그림을 질문을 신이 하갈하게 던진 두 질문과 유사하게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로 전환하였다. 솔직히 그가 신이 하갈에게 한 질문을 미리 알았는지는 확인 할 수는 없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모르겠지만, 고갱의 신의 위대한 질문들을 자신의 자살노트 그림에서 반복하고 있다.

그림의 오른쪽에는 세 명의 여인과 어린아이가 있다. 이 부분은 삶의 시작을 의미하고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라는 질문에 해당한다. 그림의 가운데 부분은 청년과 장년 시기의 일상생활을 상징하고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묘사이다. 그리고 그림의 왼쪽에 앉아 있는 할머니는 죽음을 맞이하면서 깊은 상념에 빠져있다. 할머니 앞에는 하얀 새는 인간 말들의 부질없음을 상징한다. 그림의 뒤편에 자리 잡은 석상은 피안의 세계를 표현한다. 고갱은 이 그림에서 이전에 그리스도교 종교의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타히티의 여신인 히나(“소녀”라는 의미)를 그린 동상으로 과감하게 대치하였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이 질문은 인간이 던질 수 있는 가장 원초적인 질문이다. 우리는 무슨 경로로 이 세상에 태어났는가? 우리는 왜 인간으로 태어나 이런 고민을 하는 것인가? 우리는 왜 지구에 태어났는가? 우리는 대한민국이란 영토에 태어나 2013년에 살고 있는가? 어떤 존재는 인간으로 태어나고, 어떤 존재는 애완견으로 태어나는가? 어떤 이는 부잣집 자녀로 태어나고, 어떤 이는 가난한집 자녀로 태어나는가? 우리에게 종교가 있다면 우리는 왜 한 종교를 신봉하고 다른 종교를 신봉하지 않는가?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왜 무신론자가 되었고 혹은 불가지론자가 되었나?

이러한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런 질문은 <욥기> 38장 3절에 신이 욥에게 한 질문과 유사하다. 폭풍 가운데 신이 등장하여 욥에게 묻는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우리는 이런 질문를 하지 않는다. 그 답과 과정이 실용적이지 않기 때문이지만, 이 질문만큼 삶에 중요한 질문은 없다.

고갱은 그림을 오른편에 이 질문에 대한 표현으로 앉아있는 세 명의 타히티 사람들과 간난 아이, 그리고 그 옆에 웅크려 앉아 있는 검은 개를 그렸다. 세 명의 타히티 사람들 중 왼편 두 명은 여성으로 그림의 관찰자인 우리를 응시하고 있다. 그 옆에 등을 돌린 원주민은 노란색 살갗의 여인들과는 달리 짙은 갈색 살갗의 남성이다. 아마도 고갱 자신의 모습일 것이다. 이전에 브르타뉴에서 자신을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로 표현한 것과는 달리 자신을 그러 흙으로 돌아갈 인간으로 그렸다. 그 옆에는 앞으로 펼쳐질 시간을 알지 못하는 어린아이가 누어자고 있다. 동물이나 인간이나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모르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림의 두 번째 부분인 사과를 따는 타히티인의 모습의 오른편 상단과 세 명의 타히티인 왼편상단에는 그림 전체의 주제를 이해할 수 있는 단서가 숨겨져 있다. 분홍색 긴 치마를 입은 두 명이 어깨동무하며 자궁과도 같은 검은 색 동굴에서 나오는 모습이다. 검은 색 동굴 옆에는 나무 한 그루가 서있다. 중간에 등장하는 사람이 사과를 따는 모습에서 유추해 보면, 이들은 <창세기> 1장과 2장에 등장하는 원초적인 최초의 인간들인 아담과 이브이며, 이들이 거니는 장소는 에덴 동산이다.

고갱은 타히티를 지상의 에덴 동산으로 해석하고 그 그림의 인물들을 인간에게 던지는 원초적인 상징으로 표현하였다. 검은 동굴에서 나오는 두 명, 아담과 이브의 얼굴은 그다지 밝지 않다. 아담이 왼손을 가지런히 들고 오른손으로는 이브의 어깨를 감싸고 있지만, 분위기는 심상치 않다. 성서에서 아담과 이브는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 여성은 해산의 고통을, 남성은 노동의 고통을 감내해야만 한다고 전한다. 고갱도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면서,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가를 묵상하면서, 자신의 삶이 그리 편하지 않았음을 아담과 이브의 표정에서 표현한 것 같다.

그림의 가운데 부분은 대각선으로 세 인물이 묘사되어있다. 이들 중 가장 중요한 인물일 뿐만 아니라 그림전체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인물이 가운데 사과나무에서 사과를 따려고 양팔을 높게 뻗은 인물이다. 그 인물이 남성인지 여성인지는 알 수 없도록 모호하게 그렸다. 이와 밀접한 관계를 지닌 인물은 그 오른쪽에 앉아 오른 손을 들어 어둠속에서 나오는 아담과 이브를 응시하고 머리를 긁는 인물이다. 그는 묻는다. “우리는 누구인가?” 인간은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 모르고 그럭저럭 살다가 시간이 되면 흙으로 돌아가는 그런 존재인가? 인간을 포함한 생물에는 살아있는 축복을 주었지만, 그 축복에는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대가가 있는데, 그것이 죽음이다.

“우리는 누구인가?” 머리를 긁는 원주민과 사과를 따는 원주민은 동일인이다. 고갱은 인간존재의 의미를 찾기 위해 아주 오래된 주제인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이브가 따먹은 금단의 열매 주제를 사용하였다. <창세기>에 의하면 에덴 동산의 수많은 나무 열매 중 신은 두 그루의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고 명령한다. 한 나무는 그 열매를 따 먹기만 하면 영생하는 “생명나무”이고, 다른 나무는 이 세상의 모든 지식이 담겨있는 “모든 지식의 나무”이다. “모든 지식의 나무”는 ‘선악과’로 잘못 번역되어 해석되어온 나무이다.

<창세기> 저자는 모든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인간인 생명나무의 열매가 아니라 “모든 지식의 나무”의 열매를 따먹도록 서술하였다. “모든 지식의 나무”는 그것을 먹는 순간 인간이 왜 사는 지, 신은 누구인지, 우리는 누구인지를 묻기 시작하는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고, 우리는 그 해답을 찾기 위해 짧은 인생의 우여곡절을 겪는다. 중앙에 “모든 지식의 나무”의 열매인 사과를 따는 타히티인의 얼굴에는 결연함과 평온함이 깃들어져 있다.

중앙의 사과를 따는 사람 왼쪽 밑으로 두 마리 고양이가 장난을 치고 있고 그 옆에 한 아이가 그 열매를 입에다 가져가 향기를 맡고 막 먹을 참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직시하고 인생의 의미를 깨닫기 시작하기 위해서는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을 가져야한다는 은유가 아닐까! 우리가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이유는, 우리가 속한 사회와 우리는 한 개인을 그 사람 자체로 보질 못하고, 그 사람과 인위적으로 연관된, 사회가 부여한 페르소나(Persona, 가면)와 혼동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그 사람이 지닌 학력, 명예, 권력, 부가 아니라, 그 사람일 뿐이다. 그 사람이 획득한 사회적인 부여는 사실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신비일 뿐이다. 우리가 삼라만상의 의미와 우리 자신의 존재의미를 알기 위해선 어린아이와 같은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청명한 마음과 눈이 있어야한다. 그래야, “모든 지식의 나무”의 열매인 사과를 먹을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우리의 인생은 죽은 후에 그대로 마치는 것인가? 죽음에 대한 묵상과 준비는 오늘 우리의 삶을 더욱 가치 있고 살만하게 만든다고 하지 않았는가? 마지막 왼편 그림은 바로 “죽음”에 관한 묵상이다. “모든 지식의 나무”의 열매를 먹은 어린아이가 순식간에 어른이 되어 가장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으로 앉아있다. 오른손으로는 땅을 디디고 있고 왼쪽은 왼쪽 허벅지 위에 가지런히 놓았다. 이 여인은 음부만 가렸을 뿐 나체이며 관찰자인 우리를 응시하고 있다. 땅을 짚은 오른 손이 그 왼편에 있는 노파의 그림자와 맞닿아 있다. 고갱은 아마도 화살처럼 흐르는 시간의 흐름을 이 경계로 표현한 것 같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사진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프랑스 야수파 화가 폴 고갱 (1848–1903)

유화, 1897, 139.1 cm x 374.6 cm

보스톤 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