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1.29. (日曜日) “명경明鏡”


나는 누구인가? ‘나’라는 존재는 왜 다른 동물이 아닌 인간으로 태어났는가? 왜 나는 여자가 아닌 남자로 태어났으며, 한국인 부모아래 태어나, 한국인이 되었는가? ‘나’라는 존재가 하는 일들은, 나의 실력과 노력으로 온전히 이루어졌는가? 아니면, 누군가에 의해, 그러한 임무가 주어졌는가?

불현 듯 찰리 채플린(1889-1977년)이 말한 인생의 정의가 생각한다. “인생은 실험이 허락되지 않는 연극입니다. 그러니 최선을 다해 열렬히 노래하고, 울고, 춤추고, 웃고 그리고 맹렬하게 사십시오. 당신도 모르는 사이에 막이 내리고 작품은 아무런 박수를 받지 못하고 쓸쓸하게 끝날 것입니다.” 채플린의 혜안대로, 인생을 연극으로 비유하지만, 인간은 특정한 배역을 맡은 배우다. 감독은 누군가가 써놓은 대본을 놓고, 등장인물에 가장 적절한 인물을 모색하여, 그 역할을 맡긴다. 배우는 자신에게 운명적으로 맡겨진 배역에 온전히 몰입해야한다. 아니 몰입이 아니라 그 배역이 ‘자기-자신’이어야한다.

인생의 불행은 인생이란 무대 위에 올라, 자신의 배역을 모르는 무식이다. 그런 사람은 일생, 자신이 아닌 다른 배역을 부러워하고 흉내를 내다 지쳐 인생을 불행하게 마친다. 인생에서 행복이란, 자신의 배역을 깨달아, 그 배역에 온전히 집중하는 신명身命이다. 신명이 없는 삶은 구태의연하고 진부하다. 그런 삶을 사는 사람들은 자신이 진부한 삶을 사는 사실 조차 모른다.

자신의 배역을 모르는 무식한 사람보다 더 불행한 사람이 있다. 자신에게 우연히 주어진 배역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이다. 그(녀)는 자신이 남들과 비교하여 실력이 월등하기 때문에, 그런 중요한 역할이 주어졌다고 착각한다. 예를 들어, 자신이 최고 권력자란 배역을 맡았다면, 그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안녕을 위해 이기심을 버리고 공평무사公平無私한 결정을 엄격하여 내려야한다. 만일 자신이 은수저를 물고 태어났다면, 혹은 사회가 그에게 많은 부를 축적하게 만들었다면, 자선慈善을 그의 삶의 원칙이 되어야한다. 부의 여신은 장님이어서, 행복의 수레바퀴를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많은 학식을 쌓을 기회를 얻어, 명성을 얻게 되었다면, 그처럼 특별한 기회를 얻지 못한 사람들에게 지식과 지혜를 골고루 나누는 삶을 영위해야한다.

‘도시’라는 문명사회를 구축한 인간이 다른 동물들보다 더 야만적인 이유가 있다. 공동체의 지도자의 배역을 맡은 사람들이, 공동체를 해 봉사奉仕하지 않고, 개인의 욕망과 행복을 위해 권력을 남용하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우연히 맡겨진 권력을 자신과 그와 관련된 이익집단을 통해 도용할 때, 그 공동체는 불행의 소용돌이에 빠져든다. 그런 공동체는 결국 비극을 맞이한다. 자신의 배역을 모르거나, 혹은 배역을 알지만,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용하는 자들의 특징이 있다. ‘오만傲慢’이다.

앞서가는 사람의 가장 큰 적은 자기-자신이다. 그런 자는 무엇보다도 자신과 자신이 맡은 리더라는 임뮤를 깊이 묻는 명상의 시간이 필수적이다. 만일 그가 신이 맡은 역할의 의미를 망각하고 조석변개하는 시기와 분노의 노예가 된다면, 권력이 그를 노예로 만들어, 사리사욕만을 볼썽사납게 추구하는 괴물로 전락시킬 것이다. 오만 한 자는, 자신에게 맡겨진 배역을 남용하여, 주위사람들 더욱 힘들게 만든다. 이 연극을 관람하는 모든 관객들은, 그의 연기가 부적절할 뿐만 아니라, 감동은커녕, 재미도 없고, 작품 전체를 망친다는 사실을 목도하고 분노한다.

오만한 사람의 눈은 내부가 아닌 외부를 향하고 있다. 자신이 눈에 박혀있는 들보를 감지하지 못하고, 타인의 눈에 있는 티를 침소봉대하며 상대방 탓을 하면 추태를 보인다. 오만한 자의 ‘장님’이다. 관객들은 그의 잘못을 명명백백하게 알고 있다. 그는 웃음거리가 된지 오래다. 그러나 그는 정작 흉물凶物이 된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없다. 자신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볼 수 있는 명정한 눈도 없고, 그 모습을 있는 그대로 비출 맑은 거울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 아둔한 장님은 자신과 공동체를 불행하게 만들 사고를 치게 마련이다. 고대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일 일반인이 아니라 왕족이나 귀족과 같은 지도자들이이다. 지도자가 오만하면, 한 치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아둔한 장님이 된다. 고대 그리스 비극작가들은 이 사고를 ‘천벌天罰’라고 말한다. ‘천벌’을 고대 그리스어로 ‘네메시스’nemesis라고 부른다. ‘네메시스’는 ‘천벌’이란 단어가 의미하는 것처럼, ‘하늘이 내린 무시무시한 벌’이 아니라,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대한 마땅한 결과’라는 뜻이다. 네메시스는 자신이 무식하여 주위사람들과 관객들은 모두 알고 있지만, 정작 자신만 모르는 벌이다. 그 주인공이 자초한 일의 결과다. 그리스 비극에 등장하는 주인공 오이디푸스Oedipus는, 사실과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는 자신의 양 눈을 상하게 만들어 장님이 되어 세상을 정처 없이 떠도는 자로 전락하였다.

나는 나에게 맡여진 임무와 직업을 당연하게 여겨 남용하는가? 아니면 내가 속한 공동체와 그 구성원들의 안녕을 위해 힘쓰는가? 나는 나의 언행을 직시하는 못하는 아둔한 장님인가? 아니면, 스스로에게 엄격한 관찰자가 되어, 그런 어리석음을 한탄하고 중단하는가? 나는 내가 무지하여 초래한 당연한 ‘천벌’을 받기 전에, 자신의 모습을 가만히 그리고 명백하게 응시할 수 있는 거울, 즉 ‘명경’明鏡을 가지고 있는가?

사진

<자녀들을 신전으로 데려간 장님 오이디푸스>

프랑스 궁정화가 베닌에 가니에오Bénigne Gagneraux (1756–1795)

유화, 1784, 122 cm x 163 cm

스웨덴 스톡홀름 국립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