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에 등장하여 여호수아가 나팔을 불며 기적적으로 무너뜨렸다는 예리코(Jericho)는 인류가 구축한 가장 오래된 도시 중에 하나다. 이 문장에서 ‘도시’란 기획된 공간에서 혈연을 넘어선 공동체가 한 세대 이상 지속적으로 거주한 인위적인 구조를 이른다. 예리코는 사해에서 북쪽으로 10㎞ 떨어진 요르단 평원에 있다. 지구상에서 가장 낮은 도시로 주변은 사막이지만, 이곳은 풍부한 지하수 공급으로 대추야자나무 숲을 이루었다. 예리코는 1949년부터 1967년까지는 요르단이 치리(治理)하다가 1967년 이스라엘이 전쟁을 벌여 점령했다. 1994년 다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로 넘겨졌다. 고고학자들은 이곳에서 20개 이상의 연속적인 거주지 지층을 발견했는데, 이 지층들 중 가장 오래된 것은 기원전 9000년이다.
예리코는 히브리 원어 ‘에리호(Yericho)’에서 유래했다. 히브리어 ‘에리호’에 대한 어원 설명은 다음 두 가지다. 하나는 히브리어에서 ‘향기가 나는’이란 의미를 지닌 ‘레아흐’ 어원설이다. 예리코는 대추야자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있고 그 안에는 오아시스가 여러 개 있어, 중동의 다른 지역과는 달리 ‘향기가 나는’ 지역으로 불릴만하다. 다른 하나는 ‘달’을 의미하는 ‘야레아흐’ 혹은 달 신인 ‘야리흐’에서 왔다는 어원설이다. 예리코는 예로부터 달 신을 섬기는 도시였다. 달은 농경민과 유목민들에게 가장 중요한 천체로 그들의 숭배대상이 됐다.
예리코가 서양인들의 기억 속에 자리 잡은 이유는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이야기 때문이었다. 이집트에서 탈출한 이스라엘인들은 40년간 광야에서 방황하다 정착할 곳을 찾기 위해 정탐꾼들을 예리코로 보낸다. 예리코는 난공불락의 성이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인들은 예리코성 주위를 하루에 한 바퀴씩 7일 동안 행군했다. 마지막 날 사제들이 나팔을 불자, 이스라엘인들이 소리 질러 ‘기적적으로’ 성벽을 허물었다고 전한다. 이스라엘 정탐꾼들을 도왔던 창녀 라합과 그녀의 가족을 제외한 모든 예리코 성 거주민이 죽었다고 기록한다.
성서를 기록한 고대 이스라엘 작가는 왜 이런 소설과 같은 이야기를 만들어냈을까? 왜 그는 이스라엘인들이 가나안으로 들어가 정착하는데, 예리코성 함락을 중요한 사건으로 다뤘을까? 서구인들이 성서를 기반으로 형성한 예리코에 대한 문화적인 기억은 실제 고고학 발굴로 수정되기 시작했다.
예리코를 본격적으로 발굴하기 시작한 고고학자는 찰스 워렌(Charles Warren)이다. 그는 1868년 성서에 등장하는 예리코 성 이야기의 진위를 가리기 위해 발굴하기 시작했다. 그 후 영국 고고학자 캐슬린 케년(Kathleen Kenyon)이 현대적인 고고학 기법을 사용해 발굴했고, 그 후에는 이탈리아-팔레스타인 합동 고고학 팀이 1997년에 시작해 지금까지 20년 동안 현장에서 발굴과 연구를 지속하고 있다.
인류는 아직 사냥-채집으로 연명하던 기원전 1만 년 나투피아 시대부터 이곳에 정착했다. 그들은 자신이 실험하던 야생재배를 그만두고 ‘신드리아스기’(기원전 1만 800~기원전 9500년)’의 소빙하기를 맞이해 한 곳에서 정착하기를 포기하고 이곳저곳 돌아다녔다. 그들은 ‘아인 에-술탄(Ein es-Sultan)’ 오아시스에 종종 들려 먹을 것을 찾았다. 이 오아시스가 후에 예리코가 되었다. 나투피아인들이 이곳에 자신들이 사용하던 반달모양을 한 3㎝ 미만의 세석기(細石器)를 남겼다. 신드리아스기가 끝난 기원전 9500년에 인류는 이곳에 일시적인 정착이 아니라 영구적으로 정착했다.
예리코 성벽은 기원전 8000년경에 구축됐다. 고고학자들은 이 시기를 농업은 시작했으나 아직 토기를 제작하지 못한 선토기(先土器) 신석기시대(PPN, Pre-pottery Neolithic)라고 부른다. 이 성벽은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요새’다. 다듬지 않는 커다란 돌들을 쌓아 올렸다. 케년은 예리코 성벽을 탄소연대측정법을 사용해 기원전 7825년의 것으로 측정했다. 이 성벽은 소위 PPNA시대에 속하는 도시의 원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이 성벽은 2000명에서 3000명이 함께 거주하는 신석기시대 공동체를 보호하기 위한 방어벽이다.
예리코 성벽의 주요 용도는 외부 공격을 막기 위한 방어 요새가 아니다. 이곳은 지구상에서 가장 낮은 장소로 비가 올 때 생기는 수로인 와디(wadi)의 물이 자연스럽게 몰리는 장소다. 또한 지구는 마지막 빙하기를 마치고, 아직 관개작업을 통해 다양한 수로를 개발하지 못해, 항상 홍수의 위험이 있었다. 예리코 성벽은 홍수를 막고 그 안에 사는 거주자들을 위한 의례장소로 건축됐다. 성벽은 두께가 1.5m에서 2m, 높이가 3.7m에서 5.2m다. 성벽은 예리코 주변 600m를 둘러싸고 있다. 물론 외부인들의 침투를 막기 위한 방어벽으로 사용됐다. 이와 같은 거대한 성벽은 계급과 노동의 분화를 통한 정교한 구성원들의 소통과 협동 없이 불가능하다. 예리코는 성벽보다 500년 앞선 기원전 8500년에 형성된 2.5 헥타르 크기의 마을이다. 이 마을은 진흙벽돌로 만든 집들이 있었고 거리는 아직 조성되지 않았다.
예리코 성안에는 높다란 망루가 있다. 이 망루는 다듬지 않는 돌을 이용해 건축됐고, 그 안에는 22개 계단이 있다. 원뿔형으로 생긴 망루는 바닥 지름이 9m, 꼭대기 지름이 7m다. 이스라엘 텔아비브 대학의 고고학자 란 바르카이와 로이 리란은 이 망루가 천문학적이며 사회통합적인 기능을 지녔다고 분석했다. 근처 산맥의 그림자가 하지(夏至)에 정확하게 망루에 떨어지고, 그 후에 마을 전체에 그늘을 드리운다.
예리코인들은 자신의 생존 기반인 사냥과 채집을 버리고, 농업을 주업으로 택하는 과정 중에 망루를 건설했다. 혈연적으로 상관없는 사람들이 한 곳에 거주하면서 계급이 등장하고 통치자가 등장했다. 몇몇 사람은 농업을 통한 잉여생산물로 부를 축적하기 시작했다. 바르카이는 인위적으로 세운 망루가 드리운 그림자는 예리코 마을에 사는 사람들에게 경외심과 영감을 주었을 것이라고 해석한다. 그것은 마치 파리에 있는 에펠탑이나, 고대 이집트의 오벨리스크처럼, 보는 사람에게 자신들이 한 공동체의 소속이며, 그 공동체의 공공이익을 위해 참여하겠다는 충성심을 강화해 줬다. 사냥채집경제에서 노동집약적인 농업정착경제와 사회계급의 탄생이라는 급변한 환경에 적응하라는 일종의 상징이라고 해석했다. 이 망루는 기원전 8300년경 건축됐고 1만1000일 이상, 즉 30~40년 동안 수많은 사람이 동원돼 완성됐다.
<사진>
예리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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