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면서부터 영웅은 없다. 영웅은 자신이라는 괴물을 극복하여, 더 나은 자아로 변모할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인간이다. 그런 의미에서 야곱은 전형적인 영웅이다. 겁쟁이 야곱은, 형 에서를 만나는 것이 두려워 두 아내, 두 여종, 그리고 모든 아이를 먼저 배에 태워 강을 건너게 했다. 만일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하면, 야곱은 강 반대쪽으로 도망칠 태세였다. 그는 자신의 모든 재산을 건네 보내고 홀로 남았다. 그는 인생의 마지막 날이 될지도 모르는 그 밤을 홀로 보낼 참이었다.
야곱이 얼마나 인간적인지! 야곱의 삶은 영웅적이지 않다. 아브라함이나 이삭처럼, 미래의 위대한 비전이나 자기희생을 그에게는 찾아볼 수가 없다. 아브라함은 낯선 땅으로 가서 자신의 꿈을 실현하는 데 100년을 기다릴 만큼 끈기와 인내의 신앙을 가졌다. 심지어 그는 신에게 어떤 것도 바라지 않았고, 금지옥엽 같은 아들까지도 신에게 바치려 했다. 이삭은 자신이 희생제사의 제물이 될 것을 알면서도 부모를 설득하여, 자신이 제물이 되려고 했다.
반면 야곱은 여느 인간과 아니 나와 너무나 닮았다. 그는 어려운 일을 회피하고, 남이 해결해주기를 바라며, 대책도 없이 기다린다. 심지어는 자신의 가장 가까운 사람인 두 아내와 아이들까지 위험에 빠뜨린다. 그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고, 신의 명령을 아전인수로 해석하며 신과의 계약을 지키려 하기보다는 자신의 무력함과 나약함을 원망한다.
이 이야기에서 야곱은 ‘전략적인 생존자’이다. 그가 신을 의지하긴 하지만, 자기 생존을 위해 자기 나름의 방안을 세운다. 별이 쏟아지는 지중해 사막 한가운데 야곱이 누었다. 밤의 정막은 야곱의 근심과 걱정을 배가시킨다. 인생의 맨 밑바닥, 그 한가운데서 야곱이 별들을 보고 있었다.
인간은 종종 가장 우울하고 어두운 순간에 자기 자신의 ‘별’을 발견한다. 우리는 내면 깊은 곳에 들어가 자신이 누구인지 묻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심사숙고하게 되면, 자신이 꼭 해야 할 일을 찾게 된다. 야곱은 인생 여정의 바닥을 쳤다. 다음날 아침까지는 형 에서의 심중을 읽을 수 없다.
형으로부터 심판받아야 하는, 도망칠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서 야곱은 자신이 누구이며, 자신은 무엇을 해야 할 지 깊이 생각한다. 그는 이제 자신을 평생 짓눌러온 그 환영과 만날 준비가 되어있으며, 그의 한계를 시험할 준비를 마쳤다. 그는 오랜만에 ‘홀로’ 사막에 남아 있었다.
야곱은 얍복 강둑에 피곤한 몸을 뉘었다. 40세가 된 야곱은 20년 전 아버지 이삭과 형을 속이고 가출한 일을 떠올렸다. 그 20년동안 무엇을 이루었는지 야곱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버린 세월이 야속했다. 그는 그동안 열심히 일해 부자가 되었지만, 지금 이 순간이 부질없는 것처럼 여겨졌다.
그는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의 신앙을 떠올렸다. 강 건너 야영의 불꽃이 가물가물하며 연기와 함께 사라지고 있었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은 반짝이는 별들로 아름답게 깊어갔고, 사방은 너무도 조용하여 멀리서 들려오는 야생동물의 울음소리가 가끔씩 그 적막을 갈랐다.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이 밤에서 야곱은 자신의 삶에서 숨기고 싶고 기억하고 싶지 않은 수많은 장면을 떠올렸다. 그 조용한 사막 한 가운데서 야곱 자신을 억눌러왔던 과거의 환영들이 머릿속에서 복잡하게 떠올랐다.
야곱은 태어날 때부터 쌍둥이 형 에서와 경쟁관계였다. 에서의 발뒤꿈치를 잡고 태어나, 그의 이름은 ‘발뒤꿈치’였다. 다시 말해 그는 기회만 주어지면, 자신을 위해서 어떤 일도 서슴지 않는 전형적인 이기주의자로 태어났다. 아버지 이삭은 에서를 편애했다. 그는 에서가 사냥하여 가져다 주는 음식이 늙은 이삭에겐 최고의 즐거움이었고, 재산 상속을 비롯한 모든 권한을 에서에게 주기로 오래전에 결정했다.
이삭은 집에서 자신의 아내 레베카의 치마폭에서 마마보이가 된 야곱을 늘 못마땅하게 여겼다. 레베카는 모든 일을 뒤에서 조정하는 보이지 않는 손이었다. 아버지의 편애로 항상 열등감에 사로잡힌 야곱은 집에서 죽을 쑤고 있었는데, 사냥에서 돌아온 형 에서가 죽 한 그릇을 달라고 애원한다. 야곱은 그 순간 기지를 발휘해 “만일 형이 장자권을 포기하면, 음식을 주리다!” 하고 마음을 떠본다.
야곱은 그날 죽 한 그릇으로 장자로서 가져야 할 명분을 에서로부터 가로챈 것이다. 이삭은 눈이 점점 침침해지자 죽기 전에 자신의 모든 권한을 에서에게 넘기고자, 그에게 마지막으로 사슴 사냥을 해서 요리를 만들어 오라고 명령한다. 에서가 사슴사냥을 하러 나간 사이, 그 말을 몰래 엿들은 이삭의 아내 레베카는 야곱을 부추겨 눈먼 이삭을 속여 음모를 꾸민다. 레베카는 장자권이라는 명분을 소홀히 여기고 당연하게 생각하는 에서를 통해서는 신의 커다란 계획이 이루어질 수 없다고 판단했다.
레베카는 털이 많은 에서로 변장하기 위해 야곱에게 양 가죽을 뒤집어 쓰게 하고, 자신이 만든 음식을 남편 이삭에게 보낸다. 이삭은 분명히 그가 에서가 아니라 야곱이 양가죽을 덮어 쓰고 들어왔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는 야곱의 목소리를 그 즉시 알아보고,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사슴고기 음식이 염소고기 음식으로 대치되었다는 사실을 후각과 미각을 통해 확인했지만 아무것도 모른 체하며 행동했다.
이삭은 그 순간 아브라함과 이삭으로 이어진 신앙의 유산이 에서가 아닌 야곱을 통해 성취될지도 모른다고 처음으로 생각했다. 이삭은 짐짓 모른 체하면서, 야곱의 음식을 받고 그에게 모든 권한을 넘겨주었다.
이삭의 장막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레베카는 야곱을 곧바로 삼촌이 있는 하란 땅으로 도망가게 한다. 에서가 사냥에서 돌아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야곱을 죽일 게 뻔하기 때문이다.
나이 스물의 야곱은 정처 없이 떠돌이생활을 시작했다. 집을 떠나 하란으로 가던 중 베델이란 장소에서 하룻밤을 묵어야 했다. 인생은 밑바닥으로부터 구원이 시작된다는 말이 있다. 야곱은 다시는 부모와 형의 얼굴을 다시 볼 수 없을 것이라 눈물지으며 잠이 들었다. 야곱은 이 꿈에서 놀라운 광경을 목격한다. 사다리 꿈이었다. 그 사다리는 땅에서 시작하여 그 끝이 하늘에 닿았고 신의 천사들이 그 위로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게 아닌가!
심리학자 프로이트는 꿈을 ‘억압된 바램에 대한 성취’라고 정의한 바 있다. 신은 ‘바람이 이루어지는 꿈’을 통해 처음으로 야곱에게 나타난다. 신은 그에게 절망에서 빠져나올 ‘사다리’를 선사한다. 땅과 하늘을 이어주는 ‘사다리’는 신이 홍수 이후 노아에게 선사한 무지개와 유사하다. 야곱 앞에 펼쳐질 세상이 험하다 할지라도 야곱은 결코 혼자가 아니며, 자신의 삶에 특별한 목적이 있고, 그의 삶은 여러 가지 돌발적인 행동의 연속이란 사실을 처음으로 깨닫는다.
사다리의 끝은 하늘을 향해 볼 수 없지만, 그 다른 끝은 지상에 박혀 있다. 그는 하늘로 올라가려면 지상에서 매일매일 어려운 상황의 계단을 한걸음씩 올라가야 한다. 야곱은 마마보이로서의 과거를 끊고 자신의 사랑하는 아내를 찾을 것이다. 야곱이 사다리의 첫 가로대에 올라섰을 때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다. 그는 이전 아브라함과 이삭의 추구했던 영적으로 성숙한 인간으로서 첫걸음을 내디뎠다.
사진
<라 시야 천문대, 칠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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