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Lucius Annaeus Seneca는 65년에 보통사람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죽었다. 그는 네로 황제의 암살 음모에 가담했다는 누명을 써 자살을 명령받았다. 그가 죽은 뒤, 로마 역사학자 타키투스는 이 끔찍하지만 역사적인 장면을 생생하게 표현하였다. 세네카는 친구들에 둘러 쌓여있었다. 그 옆에서 기꺼이 세네카와 함께 목숨을 끊으려는 아내도 절규하면 서 있었다. 그의 나이는 65세나 70세 정도가 되었고 정규적인 운동으로 말랐지만 강인한 체력의 소유자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지병인 기관지염과 천식으로 허약한 체질이었지만, 일생을 고기를 멀리하고 빵과 과일을 주식으로 하는 소박한 식단과 체계적인 운동으로 자신의 몸을 단련시켜왔다.
세네카는 손목의 동맥을 잘라 피를 흘려보내 친구들과 아내가 보는 앞에서 철학자처럼 우아하게 생을 마치고 싶었다. 고대 그리스, 소크라테스가 그랬던 것처럼 독약을 마셔 생을 마쳤지만, 로마인들은 동맥을 잘라 과다출혈로 조용히 죽은 방법을 고안하여 이 방법을 종종 택했다. 세네카는 자신의 정신적인 멘토이자 이상은 소크라테스처럼 죽음을 선택하려고 했지만, 피가 응고되어 더 이상 흘러나오자, 스스로 뜨거운 목욕탕으로 들어가 뜨거운 증기가운에서 질식하여 생을 마감하였다.
왜 세네카는 이런 죽음을 선택했을까? 그이 죽음은 많은 의문점과 역설逆說을 낳는다. 그는 분명 소크라테스 생의 마지막을 기록한 플라톤의 <파이도>을 읽고 감동하여 자신도 소크라테스처럼 생을 마감하겠다고 결심한 것 같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시민들에 의해 젊은이들의 마음을 오염시키고 무명신을 섬긴다는 죄명으로 독배를 마시는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는 친구들과 가족들이 보는 가운데서 독배를 의연하게 마시고 조용히 죽어갔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에 비하면, 세네카의 죽음은 평점심을 유지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이 번거롭게 힘들다.
세네카는 독배를 마셨지만, 혈관질환 때문에, 독이 온몸에 퍼지지 않자 전혀 철학적이지 않는 방법을 손목에 있는 동맥을 절단하는 방법을 택했다. 이 역시, 피가 응고되어 자신이 의도한 대로 죽지 않자, 자신의 목숨을 끊을 수 있는 진귀한 방법을 고안하여 행동으로 옮긴다. 호흡기 질환 환자인 세네카는 일반인도 숨을 쉬기가 가쁜 수증기로 가득한 욕실로 들어가 스스로 호흡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세네카만의 독특한 삶을 마감하는 방식이다. 이 방식은 소크라테스 방식도 아니고 숙고하는 철학자의 마지막과도 거리가 멀다.
세네카에게는 소크라테스의 플라톤처럼, 그의 마지막 날을 극적으로 전달해주는 제자가 없다. 그 주위에는 무명의 친구들이 모여 이 위대한 철학자에 마지막으로 존경을 표시하고 후대인들에게 그가 얼마나 위대한 철학자인지 알릴 것이다. 세네카에게 로마제국의 최선의 모습 자신이며, 철학자야말로 황제하고 생각하였다. 타키투스는 자신을 소크라테스보다 더 위대하게 만들려는 세네카의 의도를 간파하고, 그의 유언을 줄줄이 남기지 않았다.
소크라테스의 삶과 죽음은 모두 그의 철학적 행위였다. 그런 행위는 당시 아테네 시민들에게 새로운 신을 도입하고 젊은이들을 타락시키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세네카는 소크라테스를 모델로 지상에서의 삶을 마감하는 ‘죽음’의 중요성을 이렇게 표현한다.
Vivere tota vita discendum est
et, quod magis fortasse miraberis,
tota vita discendum est mori.
“그것은 인생전체를 살아봐야 터득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아마도 놀라 동의하지 않으시겠지만,
죽는 방법을 터득하기 위해서는 인생 전부가 필요합니다.”
<인생의 짧음에 관하여> VII.3b
세네카의 죽음은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다르다. 그의 죽음이 자기 삶의 모델인 소크라테스의 마지막을 흉내 냈지만, 세네카의 마지막은 정반대다. 세네카는 네로 황실과 깊은 관계가 있었다. 그는 네로가 어렸을 때 선생이었고, 네로가 황제가 된 후에는, 그의 고문이자 연설 작성자였다. 네로가 세네카에게 사형명령을 내린 것은, 그의 철학이나 신앙하고는 상관이 없다. 그 이유는 세네카가 네로 폐위음모에 가담했기 때문이다. 그의 죽음은 그에게 정체성을 부여한 정치 성향때문이었다. 그가 근사한 철학으로 위장하였지만, 그는 정치인이었다.
플라톤이 전하는 소크라테스의 마지막은 완벽한 고요와 절제였다. 엄숙한 분위기에 한마디 말이 움직임이 없었고 사지도 차분했다. 모든 것이 조화로웠다. 그러나 세네카의 마지막은 뒤죽박죽이었고 실수투성이다. 계획대로 진행된 것이 아무것도 없다. 자신이 선택한 임종방법이 두 번씩이나 실패했다. 거기에는 죽음과 직면하여 머뭇거리고 결정을 뒤집는 우유부단의 상징이다. 세네카는 자신의 글에서는 ‘죽은 방법을 터득하기 위해선 일생이 필요하다’고 글로 쓰고 인생을 준비해왔지만, 마지막 순간에 마음이 요동쳤다.
네덜란드 화가 루벤스는 이 망설이는 모순된 철학자-정치가의 마지막 순간을 화폭에 담았다. 세네카는 마지막 순간에 정치권력을 탐하다 허망하게 죽었다. 그는 스스로 삶의 마지막을 선택하려는 바램과 철학자로서의 평정심 유지 사이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다. 세네카에서 삶이란 <편지들> 96.5에서 내린 정의에 더 가깝다.
Vivere militare est
“산다는 것은 전쟁을 치루는 것입니다.”
<편지들> 96.5
삶이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처럼, 세네카에게 죽음도 자신과의 싸움이며 시행착오의 과정이다. 세네카의 삶은 이기심에 갇혀 사는 우리와 유사한 점이 많이 오히려 위안이며 영감을 준다. 그는 자신에 되고 싶은 ‘세네카 이미지’를 우리에게 남겼다. 그는 자신에게 충성을 다한 친구들에게 막대한 부를 남겼다. 그런 행위조차 사후에 자신에 관한 명성을 위한 포석이었을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모델과는 거리가 멀다. 세네카 옆에서 함께 죽음을 시도한 그의 부인은 군인들에 의해 구출되어 생명을 부지하였다. 타키투스는 그의 마지막 유언을 남길 생각이 없었다. 세네카는 원칙을 고수하기 보다는 절충과 타협, 이상과 현실, 철학과 정치, 미덕과 부, 동기와 행동사이에서 절묘하게 줄타기를 시도하였다.
세네카의 마지막을 보면서, 한 가지 질문이 떠오른다. “무엇이 성공成功인가?” 그는 일생을 통해 최선의 삶 혹은 성공이 무엇인지 다양한 글들을 남겼다, 그가 로마제국의 변방 코드로바에서 태어나 수사학과 철학을 연마하였지만 시기와 질투로 망명과 불명예를 견뎌야했다. 그러다 중년에 로마제국의 제2인자가 되어, 네로황제의 고문으로 권력과 금력을 거머쥐었다. 그는 자신이 맡은 지위 때문에 점점 더 헤어날 수 없는 함정에 빠졌다는 사실을 알고 네로황제에게 은퇴를 허락해달라고 부탁한 후, 네로가 선사한 부의 일부를 돌려주고 64년에 은퇴하였다.
네로 황제는 그런 자신의 스승, 고문, 그리고 친구에서 사형선고를 내린 것이다. 그는 소크라테스처럼, 자신의 이상을 몸소 실천한 철학자는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설교한 스토아철학의 이상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한 ‘프로피키엔스’proficiens였다. 그는 가치가 있는 삶은 높은 산의 뾰족한 정상처럼 거칠고 힘들다는 것을 알려준 스승이다. 그는 <편지> 84에서 이렇게 자신의 수고를 말한다.
Confragosa in fastigium dignitatis via est.
“존경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위대한 삶은 도달하기 힘든 산의 뾰족한 정상과 같습니다.
그 정상頂上으로 올라가는 길은 거칠고 어렵습니다.”
사진
<죽어가는 세네카>
네덜란드 화가 페터 파울 루벤스 (1577–1640)
유화, 1612/1613, 185 cm x 154.7 cm
독일 뮌헨 알테 미나코텍Alte Pinakothek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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