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1.20. (金曜日) “고요”


인류는 한 치 앞을 눈으로 볼 수 없고 머리로 상상 할 수 없는 ‘불확실’이란 어두운 숲으로 들어가고 있다. 편함과 쾌락을 최선으로 우상화한 현대문명이 COVID-19이라는 복병을 만나 볼모가 된지 11개월이나 지났다. 시간이 지나면 우리 집에 불쑥 찾아온 이 ‘불청객’이 금방 떠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오산이었다. 이제는 아예 안방 아랫목에 앉아 우리 삶의 습관과 관습을 바꾸라고 요구한다. 어떻게 행동해야할지 모르는 우리는 어리둥절하고 우울하다.

기쁨이란 예측이 가능한 결과에 대한 기다림과 그 경험이다. 우주 운행의 기본 원칙은 ‘원인’과 그 원인의 자연스런 도출인 ‘결과’다. 이 과정을 말로 담은 것이 관습이며, 숫자로 간결하게 표현한 것이 과학이다. COVID-19이 인류를 좌절하게 만드는 이유는, 원인을 감추고 결과와 증상만 보여주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은 아직도 이 감염병의 원인을 찾지 못했고, 새로 감염된 환자의 반 이상은, 자신이 어디에서 병을 얻었는지 알 수 없는 ‘무증상자’로부터의 감염되었다.

이 감염병은 괴물이다. 물러서기는커녕, 오히려 기승을 부리기 시작하여 암울하고 혹독한 겨울을 준비하라고 호통을 친다. 인간에게 삶의 재미, 기쁨 그리고 의미를 부여하는 대면활동을 금지시켰다. 먹을 것을 마련해주는 생계를 위태롭게 만들었으며, 집밖으로 나가지 말 것을 요구한다. 타인과의 만남을 통해 공동체를 이루고 공공의 이익을 위한 문명을 건설해왔던 인류에게, 그러지 말하고 명령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인간에 대한 정의인 ‘도시 안에 거주하는 인간’이란 정의를 폐기하고 새로운 용어를 만들어 내야할 참이다.

지인이나 타인이나 상관없이 누구를 만나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야하고, 낯선 사람에게 말을 건네지 않겠다는 표시로 마스크를 쓴다. 마스크는 당신도 나에게 말을 걸지 말라는 경고다. 대면문화를 구축된 문화의 문명의 핏줄인 경제는 벼랑 끝에서 깊은 바다로 몰락하기 직전이다. 그런 혼란을 겪는 국민에게 희망을 보여줄 정치는 이 불확실한 미래를 절망으로 못질하고 있다. 이 상황은 가상이 아니라 현실이다. 위기에 봉착한 개인이나 혹은 그(녀)가 속한 사회는 가야할 방향감각을 잃는다. 인간은 자신에게 정체성을 부여한 습관, 사회적인 관습, 취미, 인간관계를 유지할 수 없다. 우리가 이런 일련의 행위들을 더 이상 지속할 수 없을 때, 정체성의 붕괴는 심리적이며 정신적인 불안과 착란으로 이러질 것이다.

아무리 장구한 시간이라도 지나고 보면 순간이 인생이란 사실을 깨달은 인간에게 희망이 있다. 그(녀)는 자신의 사적인 일상에서 삶의 의미를 발굴하기 때문이다. 그는 매순간 자신을 살아있게 만드는 움직임을 응시하고 기뻐한다. 들숨과 날숨을 나의 생명을 지켜주는 알파와 오메가다. 누군가 나에게 호흡을 선물하여, 내가 의식하기 못하거나 심지어 잠을 잘 때도 호흡을 유지시켜준다, 누군가 저 놓은 산과 저 깊은 샘에서 물을 만들어 나에게 선물하였다. 내 입으로 들어간 물 한 모금이 목구멍을 통해 온 몸으로 퍼져 나를 살아있게 만들 것이다. 이 위기는 내가 지나쳤던 일상을 응시하여 감사하게 만든다.

고대 페르시아 제국의 다리우스 대왕은 기원전 5세기 초에 이집트에서 스키타이까지 이오니아에서 인도까지 23개국을 정복하여 다스린 인류최초의 제왕이었다. 일생을 전쟁터에서 살은 다리우스는 불행이 무엇인지 아는 인간이었다. 그는 이란 남부에 자신의 의례도시인 ‘페르세폴리스’를 건설하고, 그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는 ‘낙쉐-루스탐’이란 장소에 무덤을 마련하였다. 이곳에는 사방을 병풍처럼 두른 돌로 이루어진 산들이 있다. 다리우스 대왕은 우뚝 솟아오른 산 바위 중앙을 십자형으로 다듬어, 그 안에 자신의 무덤을 안치하였다. 그는 이 무덤 입구에는 자신의 삶의 철학을 담은 비문이 새겨져 있다.

이 비문은 그는 조로아스터교의 주신인 아후라마즈다가 자신을 많은 사람들 가운데 특별한 한 사람으로 구분하여 왕으로 만들었다고 찬양한다. 그런 후, 아후라마즈다 창조한 네 가지를 칭송한다. 첫째, ‘저 너머에 있는 하늘’이다. 하늘은 인간의 머리 위해 항상 존재하지만, 그 끝을 알 수 없고 전부를 관찰할 수 없다. 분명히 존재하지만 갈수도 경험할 수 도 없는 신비다. 인간을 하늘과 그 안에 운행하는 해, 달, 별들을 통해 경외敬畏를 배운다. 둘째, ‘여기에 있는 땅’이다. 인간의 다리 밑에 존재하며, 발들 디딜 수 있는 발판이다. 땅은 우리에게 먹을 것을 무상으로 생산해주는 어머니와 같은 존재다. 인간은 땅에 뿌리를 박은 나무들을 통해, 땅을 기반으로 삼아 언제나 하늘을 지향하는 불굴의 의지意志를 배운다.

셋째, 아후라마즈다는 ‘인간’을 창조하였다.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다른 점이 하나있다. 동물들은 자신의 죽을 것이란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기에 그 순간을 산다. 왜냐하면 그 순간이 영원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집안에서 키우는 반려묘과 반려견은 순간을 산다. 미래에 대한 걱정이 없다. 오직 인간만이 자신이 죽을 것이란 사실을 애써 회피하고 망각한다. 산다는 것은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며, 그런 마음가짐이 인생을 사는 지혜다. 고대 페르시아어로 ‘인간’을 의미하는 ‘마르티야’martiya다. ‘마르티야’의 본래의미는 ‘죽음을 아는 존재; 죽음을 준비하는 존재’라는 뜻이다. 아후라마즈다는 자신이 순간을 산다는 엄연한 사실을 아는 인간에게 인생을 살맛나게 살 수 있는 비밀을 선물하였다. 넷째, 아후라마즈다는 인간이 우울하게 인생을 행복’을 주었다. ‘행복’을 의미하는 고대 페르시아 단어 ‘쉬야티'shiyati의 심층적인 의미는 ‘고요’이다. 행복이란 자신이 누구인지 스스로에 조용히 묻는 ‘자기응시’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응시라는 ‘고요’을 통해 자신을 지긋이 바라보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수용하는 평안함을 얻을 것이다.

애벌레는 고치를 삶의 끝이라고 부르지만, 고요를 수련하는 인간에게 고치란 나비가 되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준비과정이다. 다가오는 겨울은 ‘우울’이 아니라, 우리에게 ‘고요’이야한다. 이 겨울은 자신만의 개성을 드러내는 나비가 되라는 총성이다. 희망은 절망이 낳은 자식이며 확실은 불확실의 제거이기 때문이다.

사진

<낙크쉐 루스탐 무덤>

이란 남부. 오른편에서 두 번째가 다리우스 대왕 무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