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에는 교리가 있다. 교리는 개별 종교의 정체성과 핵심사상을 간결하게 다음 공식이다. 우리가 개별 종교를 알기 위해 처음 접하는 손쉬운 문장들이지만, 동시에 그 종교가 가진 진리를 담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왜곡이다. 교리는 태생적으로 자기모순이다.
‘그리스도교란 무엇인가?’란 질문에 대한 대답은 수 만 가지다. 자신의 지적인 수준과 경험을 통해 다양한 대답들을 내놓을 것이다. 만일 자신들이 머리를 쥐어짜 떠올린 일련의 교리만이 ‘진리’이고, 타인이 고안해낸 교리를 수용하지 않는다면 문제가 발생한다. 그리스도교가 등장하기 시작한 1-4세는 가장 설득력이 있는 교리를 만들기 위한 ‘종교회의’의 연속이었다. 누군가 권위를 쥐고, 올바른 가르침인가 혹은 거짓된 가르침인가를 분별해야하기 때문에. 스스로 그런 권위를 부여받았다고 주장하는 집단들이 등장하여, 다른 주장을 하는 집단들과 갈등을 빚고 심지어는 전쟁도 불사하였다.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유대교, 불교, 자이나교(, 유교)의 형성과정은 교리논쟁과 반목의 역사다. 그런 반목은 지금까지도 지속된다.
‘교리’를 의미하는 영어단어인 ‘도그마’dogma 혹은 ‘독트린’doctrine은 그리스도교 생성하기 시작한 로마제국시대에 등장하였다. ‘도그마’ 혹은 ‘독트린’은 모두 라틴어에서 ‘가르침’이란 의미를 지닌 단어인 ‘독트리나’doctrina에서 유래했다. ‘독트리나’는 ‘선생’을 의미하는 doctor와 추상을 의미하는 여성접미사 –ina의 합성어다.
라틴어 doctor는 ‘보여주다; 알게 해 주다’라는 의미인 동사 ‘도케레’docere에서 왔다. ‘교리’의 의미심장한 의미는 ‘도케레’에 숨어있다. ‘도케레’는 ‘그럴듯하게 보이다’란 의미를 지닌 ‘데케레’decere의 사역형으로 ‘그럴듯하게 보이게 하다’란 뜻이다. 그리스어 ‘도그마’δόγμα도 그런 뜻이다. ‘그럴 뜻하게 보이다’란 의미를 지닌 그리스어 동사 ‘도케인’δοκεῖν에서 파생된 단어로 ‘도그마’란 ‘진리는 아니지만 진리처럼 보이고 싶은 일련의 문장들’이다.
하버드 대학교의 종교학자 하비 콕스(1929-)가 2010년에 쓴 The Future of Faith에서 21세기 현대인들에게 ‘종교인’과 ‘비종교인’ 그리고 ‘무신론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근본적으로 묻는다. 그는 오늘날의 종교인들은 점점 각 종교나 종파의 교리보다는 윤리적인 지침이나 영적인 훈련에 더 관심이 있다고 진단한다. 이러한 경향은 돌이킬 수 없는 추세여서 종교가 오랫동안 소중하게 생각해온 조직이나 교리보다는, 현대인의 삶을 근본적으로 성찰하고 그것을 위해 최선을 다할 때 행복을 느낀다. COVID-19상황에서 그의 지혜는 종교인들이 취해야할 새로운 태도를 알려준다.
20세기 초에 등장한 새로운 종교운동이 있었다. ‘종교 근본주의’다. 이것은 현대인들이 추구하는 새로운 형태의 종교에 대한 불안감의 표시였다. 이 종교근본주의 분파들이 그나마 그리스도교를 연명시키고 있지만, 퇴출되어야할 과거의 환영이다. 산업혁명을 경험하여 잉여자본을 가진 서양인들이 식민지개발을 통해 동시에 발굴한 학문분야가 있다. 자신들이 정복한 식민지를 효과적으로 치리하고 자원개발을 위해 특히 고고학과 지질학을 태동시켰다. 이 고고학자들과 지질학자들의 발굴을 통해 이스라엘 역사보다 훨씬 오래된 문명들,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그리고 히타이트 문명이 발견되었다. 그들은 성서가 가장 오래된 책이 아니라는 사실을 충격적으로 알게 되었다. 더욱이 성서는 고대 오리엔트 세계의 맥락 안에서 해석되어야만 한다는 엄연한 현실을 수용해야만 했다. 특히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1859년)의 출간과 더불어 그 책이 가져다준 인간과 우주의 이해에 대한 혁명적인 시도는 감히 빅뱅 같은 사건으로 성서를 축자적이고 신봉하고 자기중심적인 필터로 받아들이던 그리스도인들에게 충격이었다.
당시 종교인들은 수천 년 동안 획득한 인류의 지혜나 과학적인 지식을 수용하여 교리라는 구속복을 입은 종교, 특히 그리스도교에 대한 자유를 선사하기 보다는 스스로 근본주의로 무장한 채 비겁하게 그 구속복을 더욱 단단하게 조였다. 근본주의로 무장한 신앙은 점점 세력을 잃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감동이 없다. 종교는 점점 정치적-경제적 이윤을 기초로 한 각자의 시대착오적인 교리 주장으로 심지어는 그리스도교 안에서도 교파 간의 충돌과 분열로 좌초하고 있는 실정이다.
콕스는 21세기 현대인들은 더 이상 숨 막히는 교리나 종교 조직 그리고 4세기 로마에서 일어났던 종교와 정치의 결합에 관심이 없다고 말한다. 현대인들은 ‘무엇을 믿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가’에 관심이 있다. 그는 지난 2,000년 동안의 그리스도교의 역사를 3단계로 설명한다.
그는 그리스도교가 처음 등장한 1~3세기를 ‘신앙(faith)의 시대’라 부른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믿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의 가르침을 행하느냐가 중요했다. 30년 남짓 짧은 생을 산 청년 예수의 삶을 오늘날 나의 삶의 기준으로 받아들여 따르느냐 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4세기에 들어서면서 제국을 형성한 로마가 통치 수단으로 선택한 그리스도교는 선과 악, 나와 너, 정통과 이단의 구별 수단이 됐다. 콕스는 이 두 번째 시대를 ‘믿음(belief)의 시대’라 명명한다. 그는 지난 4세기부터 20세기까지 이 믿음의 시대가 진행되었다고 분석한다. 이 기간 동안 그리스도교는 ‘정통’과 ‘올바른 가르침’에 매몰되어 주도권을 유지하기에 급급했다.
15~16세기 르네상스와 종교 개혁, 그리고 여파인 과학 혁명으로 유럽은 새로운 그리스도교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30년전쟁 (1618년~1648년)에서 드러났듯이 긍정적인 형태가 아닌 자신의 이데올로기에 매몰된 근본주의가 세를 부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21세기에 들어와 이런 근본주의적 그리스도교는 점점 세력을 잃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세계적으로, 그리고 한국 내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자신들이 속한 사회와 소통을 차단하기 위해 자기들만의 게젤샤프트를 만들어 자화자찬하는 이상한 집단이 되었다. 콕스는 오늘날의 그리스도교는 ‘영성의 시대’로 진입했다고 주장한다. 점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도그마와 교리를 무시하고 종교 간의 울타리를 걷어치우고 있다. 콕스는 영성이 조직화된 종교를 대체할 것이라고 선언한다.
사실 초대 그리스도교는 기도와 예배 그리고 자비의 행위를 강조한 영적으로 유기적이며 생동감이 있는 조직이었다. 그리스도교가 유대교의 한 분파로 시작해 그 안에서 교파가 형성되어 교리 문제로 싸웠을 리 만무하지만, 이들이 가진 신앙은 로마의 그리스도교 학살에도 자신들의 목숨을 내놓아 순교할 정도로 강력한 삶의 원동력이었다. 순교는 자신의 삶의 원칙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는 행위다. 로마황제 콘스탄티누스가 그리스도교를 자신의 종교로 채택한 이유도 다른 종교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이 순교 문화때문이다. 약동하던 그리스도교는 4세기에 들어 정통 교리 논쟁에 휘말리면서 그 역동성을 잃고 교리라고 알려진 일련의 고백에 동의해야 그리스도인이 되는 재미없는 사상으로 고체화됐다.
오랜 세월 동안 그리스도교는 생활 윤리나 자비 행위보다는 교리를 숭배하는 정책을 강조했고 슬프게도 그러한 경향은 오늘날에도 만연해 있다. 초기 그리스도교와 같은 자생적이고 감동적인 모델이 만들어지지 않는다면 그리스도교는 사라질 것이다. 망망대해에서 침몰하는 그리스도교라는 배에 남은 몇 명의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를 한 종교나 종파에 속한 종교적 인간이 아닌 인류보편적인 영적인 인간이라고 스스로 정의한다.
이것은 단지 그리스도교에만 국한된 주장이 아니다. 나는 오랫동안 대학에서 그리스도교 과목들을 가르치면서 느낀 점은 학생들이 종파의 편협한 교리나 종교집단에서에서 말하는 ‘올바른 가르침’에는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들의 관심은 개별종교의 교리나 과학이 도달할 수 없는 경외심이나 신비였다.
오늘날의 그리스도교는 소속감을 강조하지만 현대인들은 종교를 통해 자신의 삶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하고 싶어 한다. 그들은 교황이나 감독이 왜 있어야 하는지 관심도 없고 알려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또한 복잡한 삼위일체나 종말론과 같은 교리를 먼 과거의 이야기일 뿐 자신의 삶과 유리된 이상한 소문으로 여긴다. 뿐만 아니라 다른 민족이나 문화에서 발생한 종교들에도 관심이 많으며 그들의 삶을 진정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그들은 교회에서 강조하는 “사도권의 연속성”, 즉 예수와 베드로 그리고 사도로 이어지는 종교적 권위는 뜬금없는 소설로 여긴다. 초기 그리스도교에 전문적인 직업을 가진 사제가 존재했을 리 없다. 심지어 그리스도교의 기초를 놓았다는 바울은 천막을 만들어 파는 장사꾼이었다. 초기 공동체에는 여성들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는데, 특히 막달라 마리아는 당시 초기 그리스도교 문헌을 통해 그 역할이 재조명되고 있다. 신약성서 <사도행전>에는 전도자였던 네 명의 여성이 존재하며, 뛰어난 사도로 불린 유니아Junias역시 여자였다. 아직도 그리스도교 안에서 여성이 사제가 될 수 없다는 제도는 시대착오적인 당찮은 생각이다. 우리는 삶을 심오하고 살고 자하는 개별인간들의 깨달음을 존중하는 영성의 시대에 살고 있다.
사진
<하이비 콕스>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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