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은 내가 오늘 해야 할 한 가지를 생각해내고, 그것을 효율적으로 완수해야할 전략을 세우는 기회다. 새벽은 너무 쉽게 도망가 버린다. 어제 밤저녁, 머물 거리다가, 하루를 마감하는 의례를 소홀히 하거나, 어제의 걱정을 과거의 떨쳐내지 못하고, 그 다음 날까지 본의 아니게 끌고 온다면, 온전한 잠은 달아나고 신체와 정신이 잠을 통해 푹 쉬지 못하기 때문에, 새벽은 게으름에 파묻혀 사라지고 만다.
새벽은 정적으로 가득한 정원이다. 아무것도 숨을 쉬지 않는 침묵의 시간이다. 모든 것이 하루하는 빅뱅을 기다리는 동안, 우주에 질서를 허락한 첫 빛줄기가 등장한다. 기원전 6세기 히브리 시인은 그 순간을 이렇게 말했다:
“우주를 관장하는 거대한 원칙들이 결정하였다.
이들은 자신의 생각을 입을 통해 표현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들은 자신의 말이 실제 물건으로 만들어 질 것을 믿었다.
그래서 그들은 말했다. “빛이 생겨나라!”
그랬더니, 그들의 말이 사건이 되어 “빛”이라는 물체로 등장하였다.”
<창세기> 1.3
이 빛은 태양이 아니다. 혹은 137억년 전에 일어났던 빅뱅Bigbang도 아니다. 빅뱅보다 더 근본적인 생경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우주를 탄생시킨 질서秩序다. ‘빛’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단어 ‘오르’(ʾôr)의 가장 원초적인 의미는 흑암으로 뒤덮인 혼돈을 물리치는 새벽의 첫 빛줄기, ‘여명黎明’을 의미한다. 좌정하고 가만히 앉으며, 내가 어디에 있던지, 그 여명을 나를 샅샅이 찾아 헤매다 지구의 한 구석에 앉아있는 나를 친절하게 찾아와 비추기 시작한다.
영지주의 복음서은 <도마복음서>는 어록 4에서 어린아이와 같은 심정으로 흘러가버리는 순간에 몰입하라고 요구한다. 그리고 그 몰입을 통해, 과거에 대한 후회를 거두고,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희망을 접어두고 지금-여기에 집중하라고 말한다.
로마철학자 세네카는 지금-여기의 중요성을 헤카토Hecato라는 스토아철학자의 말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헤카토가 말했다:
희망하기를 그치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희망希望과 두려움이라는 질병의 주된 원인은 지금의 상황에 우리를 적응시키지 않고
우리의 생각을 너무 멀리 보내는데 있다.”
세네카 <도덕적 편지들> 5.7.b
희망이 우리가 조절할 수 없는 우연에 매달리는 허상이다. ‘지금-여기’ 몰입을 방해하는 희망이나 두려움은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에 최선을 경주하는 ‘아모르 파티’amor fati에 대한 도전이다. 희망과 두려움의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지금의 나에 몰입하지 못하는 ‘부족’과 괜한 ‘걱정’의 도사리고 있다. 예수의 언행을 통해 깊은 깨달음을 얻는 한 지식은 어린아이와 같은 집중을 <도마복음서> 어록 5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숫자는 콥트어 원문의 행 표시이며, 영어 철자는 콥트어 음가에 대한 자역이다)
33.10b peze I(esu) X(ristos)
33.11 sogōn petmpmto mpekho ebol
33.12 agō peʘēp erok fnaqōlē ebol
33.13 nak mn la(’)ū gar efhēp efnaušēf
33.14 ebol an
33.10b 페제 예수 크르스토스
33.11 사곤 페틈펨토 므페크호 에볼
33.12 아고 프셉 에록 프나콜레 에볼
33.13 나크 멘 라우 가르 에프펩 에프나우쉐프
33.14 에볼 안
위 문장에 대한 직역과 의역은 다음과 같다:
(직역)
예수 그리스도가 말했다.
“당신의 얼굴 앞에 있는 것을 알아보아라.
그러면 너로부터 감추어진 것이 너에게 분명해 질것이다.
왜냐하면 분명해 지지 않을 감추어진 것은 없기 때문이다.”
(의역)
예수 그리스도가 말했다:
“지난 일을 후회하지 말고 미래 일을 걱정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지금-여기에 몰입해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당신에게 시급한 것을 가려내서, 그것을 찾아내십시오.
그 시급한 일 한 가지가, 실타래처럼 얽인 문제들을 푸는 열쇠이며 등불입니다.
그것은 육중한 대문을 여는 열쇠이며 컴컴한 산길을 비추는 등불입니다.
그 문을 열면, 그 안에 감추어진 것을 두 눈으로 분명히 보게 될 것입니다.
등불에 불을 붙이면, 보이진 않던 것을 분명하게 보게 될 것입니다.
세상에는 드러나지 않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문제는 당신이 면전에서 일어나고 있는 가장 시급한 문제를 깨닫지 못해,
등불을 준비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1세기 팔레스타인에 사는 범부라고 가정하자. 어느 날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가 나를 찾아와 갈 길을 알지 못해 헤매고 있는 나에게 이런 말을 건낸다. 이들은 우리가 흔히 보는 남자와 여자일 뿐이다. 한명은 유대 랍비이며, 다른 한명을 그가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승화시키는 방법을 아는 구원자라고 믿는 예수의 수제자다. (영지주의에서는 막달라 마리아가 베드로를 능가하는 수제자다) 영지주의에서는 영적인 존재인 예수를 우주에 질서를 주기 위해 온 원칙인 ‘로고스’Logos로, 막달라 마리아는 그 로고스를 세상에 전달하는 지혜인 ‘소피아’Sophia를 상징한다.
만일 내가 내 면전에 있는 이 두 사람으로부터 나오는 신적인 현존을 인식하다면, 나는 바로 그 순간에 이들이 뿜어낸 빛으로 세상을 분명하게 보기 시작할 것이다.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는 겉보기에는 여느 남자와 여자와 같다. 내가 길거리에서 이들과 마주친다면, 그대로 지나가 버렸을 것이다. 내가 이들의 마음 속에 있는 것을 알아내기 위해서는, 먼저 대상의 겉모습을 보는데 익숙한 내 시력을 점검해야한다. 이들 안에 숨겨진 신적인 현존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그 보통의 인간을, 특별한 인간으로 깊이 보는 관찰이 필요하다.
여명은, 어제와 같이 또 다른 날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가 아니라, 우주의 탄생을 알리는 빅뱅의 순간 보다 더 근본적이며, 나의 깨달음 요구하는 총성이다. 나는 내 면전에서 펼쳐지는 우주의 신비를 풀 수 있는 실마리를 알아차리는가? 아니면 어제와 내일에 대한 후회와 걱정으로 이 순간을 놓치고 있는가?
사진
<흑마>
영국화가 제임스 워드(1769–1859)
유화, 80.6 cm × 112.1 cm
런던 테이트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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