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1.11.(水曜日) “세 가지 의무義務”


기원후 2세기 유대교 랍비들이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경전인 ‘토라’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경전을 만들기 시작했다. 유대인들은 기원전 6세기 예루살렘이 바빌로니아에 의해 파괴됐을 때 일련의 책들을 경전經典으로 수집하기 시작했다. 기원전 515년 예루살렘 성전이 페르시아 제국의 도움으로 재건됐지만, 솔로몬 시대의 영광을 회복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들은 영원히 무너지지 않은 천상의 예루살렘을 ‘토라’라는 이름으로 수집하기 시작한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사는 지역에서 경전을 읽기 시작하고, 기원후 60년경 일련의 책들은 ‘타낙’TaNak이란 이름으로 유대교 회당의 예배에 사용됐다. ‘타낙(Tanak)’이란 ‘토라(모세오경)’ ‘느비임(예언서)’ 그리고 ‘케투빔(성문서)’의 첫 글자를 사용해 만든 이름이다. 타낙은 그리스도교의 구약성서에 해당한다.

이들은 ‘타낙’이란 책을 통해 유대 국가를 회복하려 시도했으나 운명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기원후 70년 로마제국은 소요와 반란이 잦은 유대를 침공해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파괴한다. 유대인들은 ‘타낙’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담긴 경전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랍비들은 135년에서 160년 사이 ‘타낙’과는 다른 새로운 경전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미쉬나’Mishnah이다. 히브리어로 ‘미쉬나’는 ‘반복학습으로 배우기’라는 의미다. 그래서 미쉬나를 연구하는 학자들을 ‘탄나임’ 즉 ‘반복하는 자들’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비록 문헌형태이지만 이 새로운 경전은 구전작품이기 때문에 학생들은 암기하며 공부했다.

200년경 랍비 유다가 마침내 다양한 글로 구성된 ‘미쉬나’를 완성하였다. 미쉬나는 역사도 아니고 이야기도 아니며 신학도 아니었다. 유대인들의 삶을 지배하는 내용이었다. 미쉬나는 여섯 ‘세다림(Sedarim, 순서)’에 의해 정리된 방대한 율법적 결정사항들이었는데, 이 여섯 세다림은 다음과 같다. 제라임(Zeraim, 씨앗) 모에드(Moed, 축제) 나쉼(Nashim, 여성) 네지킨(nezikin, 손해) 코데쉼(Qodeshim, 성스러운 것들) 토호롯(Tohoroth, 정결규칙). 이들은 다시 63개의 소주제로 나뉜다.

미쉬나는 ‘타낙’으로부터 자랑스럽게 거리를 두며, 경전을 인용하지도 않았고 그 가르침에 의존하지도 않았다. 미쉬나는 유대인이 ‘무엇을 믿었느냐’가 아니라 유대인들이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관심을 가졌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일생생활에서 어떻게 ‘차별된 거룩한 행위’를 하느냐가 관건이었다. 사실 시대의 필요에 맞춰 재해석될 수 없는 경전은 죽은 것이다. 미쉬나는 단순한 지적 추구가 아니며, 그 연구가 목적이 아니다. 미쉬나는 실제 행동을 유도하도록 영감을 줘야 한다. 경전을 읽는 자는 토라를 실제 상황에 적용시키고, 이것이 공동체의 모든 이들에게 말할 수 있도록 할 의무를 지닌다.

이 새로운 경전의 목표는 불명확한 구절을 명확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의 화급한 문제에 응답하는 것이다. 실제 적용할 방법을 찾지 못하는 한 경전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랍비들은 경전을 ‘미끄라(Miqra)’, 즉 ‘부름’이라고 불렀다. 경전은 유대인들을 행동으로 인도하는 요구이다. 미쉬나는 실생활에 적용할 법률에 관한 내용이다. 그러나 미쉬나의 ‘네지킨’ 편에 등장하는 ‘선조들의 어록’이란 부분은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잠언집이다. ‘

‘토라’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보통 ‘율법’이라고 번역되나 실제로는 ‘가르침’이나 ‘올바른 길로 인도함’이란 의미이다. ‘토라’가 히브리 성서(그리스도교의 구약성서에 해당)의 내용을 지칭할 때, 그 성서의 첫 다섯권 책들, 즉 창세기, 출애굽기, 민수기, 레위기, 신명기를 이른다. 이 다섯 권의 책들은 흔히 ‘모세오경’이라 불린다. 모세오경은 문자로 기록된 토라이기 때문에 ‘토라 쉐비트타브’torah shevichtav, 즉 ‘문전(文傳) 토라’라고 불린다. ‘토라’라는 용어는 히브리 성서에서 그 중요성 때문에 ‘히브리 성서’ 전체를 의미하기도하다. 전통에 의하면 시내 산에서 모세가 받은 ‘문전 토라’이외에 ‘구전(口傳) 토라’가 있다. 구전 토라는 히브리어로 ‘토라 쉐브알페’torah shebealpeh라고 부른다.

랍비들은 로마제국아래서 신음하는 유대인들에게 그들이 가야할 길을 제시하기 위해, 구전토라의 내용을 역설적으로 문전으로 남겼다. 당시 유대 지도자들은 <선조들의 어록> 1b에서 다음 세 가지를 삼가 이행해야한다고 기록한다.

הֵם אָמְרוּ שְׁלשָׁה דְבָרִים, הֱווּ

מְתוּנִים בַּדִּין, וְהַעֲמִידוּ תַלְמִידִים הַרְבֵּה, וַעֲשׂוּ סְיָג לַתּוֹרָה

“그들은 세 가지를 말했다.

신중한 판단을 해라; 제자들을 양성하라; 그리고 토라에 울타리를 쳐라!”

위 문장에서 ‘그들’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이들은 고대 이스라엘의 예언자들 혹은 그들이 남긴 문전을 해석한 당시 유대 지도자들의 모임인 산헤드린 일원들일 것이다. 이들이 말하는 세 가지가 히브리 성서(구약성서)의 세 가지 핵심은 아니다. 오히려 기원전 200부터 기원후 100년 사이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중요한 세 가지 나열이다.

첫 번째는 ‘신중愼重한 판단’이다. 리더들은 판단하는 사람들이다. 그의 결정이 수많은 사람들의 운명을 결정하기 때문에, 이들에게 요구하는 덕목은 ‘신중’이다. ‘신중’이란 그 해당 문제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인내의 연습이다. 자신에게 익숙하지 않은 문제의 해결점을 찾기 위해, 가장 먼지 성급한 판단을 절제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말하기 전에 세 번 생각하고, 여러 사람들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문제는, 세 번의 세 번을 곱하여 아홉 번 깊이 묵상해야한다. 리더는 누구보다도 자신의 판단을 의심하는 사람이다. 해결해야할 문제에 대해, 마지막까지 주저하고 초조한 사람이 되어야한다. 그런 과정을 거친 신중한 판단이 최적의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두 번째는 ‘제자의 양성養成’이다. 학문은 전승된 지식이 후대학자들을 통해 시대상황에 알맞게 적응되고 최적화되는 과정을 거친다. 12세기 신학자인 ‘살스버리의 요한’John of Salsbury이 라틴어로 1159년에 저술한 <메타로지콘Metalogicon>이란 저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거인의 어깨에 앉아있는 난쟁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분명 더 많이 보고 더 멀리 있는 것을 봅니다.

우리의 시야가 더 낫거나 그들보다 더 높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이 우리를 바쳐 들고 하늘로 높이 올렸기 때문입니다.”

학문뿐만 아니라, 사회를 지탱하는 관습과 규율은, 오랜 전통을 통해 전해 내려온 시행착오를 통해 완상되어왔다. 학문의 전승은, 문명과 문화의 핵심이다. 학교에서의 지식과 지혜의 전달을 통해 제자 양성은 그 공동체의 생존과 가치를 결정하는 보루다.

세 번째는 ‘토라범위 확정確定’이다. ‘토라’라는 히브리 단어는 ‘활을 쏘다’라는 히브리어 동사 ‘야라’의 여성명사형으로 ‘명중’ 혹은 ‘화살이 과녁을 행해 질주하는 유일무이한 길’이란 의미다. 토라범위의 확정이란 자신에게 어울리는 과녁을 찾는 수고 이며, 그 과녁을 향해 온전히 몰입하여, 그 길에서 유유자적하는 자연스러움이다. 저자는 토라의 범위를 정해, 그 경계에 울타리를 치라고 말한다. 우리의 삶이 화살의 궤적이라면, 화살은 때로는 눈비를 맞아 흔들릴 수도 있다. 그런 시련과 외부의 방해는 게임의 일부다. 화살이 과녁을 향해 나갈 수 있는 그 경계를 정해 울타리를 치라고 경고한다. 나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신중한가?” “제자를 양성하는가?” 혹은 “경전 융통성을 허락하는 울타리를 칠 주 아는가?”

사진

<고독>을 그리고 있는 마크 샤갈 (19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