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을 사는 인간에게 사후세계는 호기심을 자극하는 성배聖杯다. 인간의 탄생은 각자에게 우연이지만, 인간의 죽음은 필연이다. 자신의 멸절성을 이해한 개인은, 숨이 멈치고 심장박동이 사라지면 ‘자기자신’이라는 정체성이 일생을 두고 기생했던 신체는 사라진다. 신체와 더불어 정신과 영혼도 사라지는가? 호모 사피엔스는 다른 동물들이나 유인원들과는 달리, 사후세계를 믿었다. 육체는 사라지지만, 영혼을 불멸하여 남겨진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점검한다고 믿었다.
<도마복음서> 어록 3은 ‘천국’에 관한 이야기다. ‘천국’이란 의미를 지닌 고대 히브리어 ‘말쿠쓰’malkûth 혹은 예수가 사용한 아람어 ‘말커타’malkətā는 장소나 시간과 연관된 단어가 아니다. 이 단어는 ‘통치하다’란 의미를 가진 동사 ‘m-l-k’(히브리어 ‘말락mālak’과 아람어 ‘멀락’(məlak)에 추상명사 어미가 접미한 단어로 ‘통치’란 의미다.
1세기 유대인들은, 로마의 식민으로 살아가면서, 자신들의 생존을 보장해줄 누군가를 기다렸다. 기원전 4세기 알렉산더 대왕이 등장하여, 문화적으로 우호적이며 종교적으로 다원적인 페르시아 제국을 물리치가 등장하였다.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그의 대를 잇는 왕들의 정책인 ‘헬레니즘’은 자신들이 군사적으로 정복한 영토의 문화를 하나의 원칙으로 통일시켰다. 알렉산드로스는 모든 인간은 한 형제-자매이며 그렇게 되어야한다고 믿는 최고의 세계시민이었다. 인류가 하나라는 생각은 고대 그리스 사상 ‘호모노미아’homonoia에서 유래한다. 호모노이아는 “모두 한 마음을 지닌 존재”라는 뜻이다. 헬레니즘 문화를 계승한 로마제국도 자신들의 종교를 강요하고, 피정복지의 종교는, 통치수단의 일환으로 일부 허용하였다.
당시 유대역사학자 요세푸스에 의하면, 적어도 세 종류의 유대분파가 있었다. 첫째는, 자신들의 경전인 ‘토라’를 달라진 정치적-경제적-사회적인 상황에서 재해석을 시도하는 ‘바리새파’다. 이들은 유대인들의 지도자로, 그들의 종교생활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의 안내자였다. 둘째는, 전통적인 유대종교의식을 보전하고 전수하는 ‘사두개파’다. 사두개파는 예루살렘에서 행해지는 의례를 관장하던 사제들이 속한 집단으로, 최초의 사제이며 모세의 형인 ‘사독’을 그들의 원조로 여긴다. 셋째는, 신의 갑작스런 개입으로 로마제국의 식민정을 끝나기를 바라는 종말론 집단인 ‘에세네파’다. 1947-1956년까지 사해의 서쪽 둑과 근처 돌산에 만들어진 쿰란 동굴에서 발견된 ‘사해사본’을 기록한 유대인들이다.
이 세 집단 중 ‘바라새파’는 가장 영향력이 있는 유대종교집단이었다. 이들에게도 ‘하느님 나라’를 첨예의 관심대상이다. <누가복음> 17.20-21에 바리새인들이 천국이 도래할 시기를 묻는 장면이 등장한다:
“바리새인들이 그(예수)에게 ‘하느님 나라가 언제 오느냐고’ 물었다.
그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하나님의 나라는 눈으로 볼 수 있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보아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말할 수도 없다.
보아라,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바리새인들은 천국이 도래하는 시점을 예수에게 요구하였지만, 예수는 그 시점에 대해 말하지 않고 그 형태에 대해 대답한다. 그들은 천국이 인간이 이해하는 시공간 안에 이루어질 이상적인 모습이라고 판단하였다. 예수는 단호하게 천국이 우리가 아는 시공간 개념하고는 상관이 없다고 말한다. 그는 말미에 의미심장한 말로 대답을 마친다. “하느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이 문장에서 ‘너희’란 1인칭을 포함한 2인칭 혹은 3인칭의 결합이다.
천국은 1인칭인 내가 만나는 이웃과의 관계에 혹은 내가 접하는 3인칭, 즉 모르는 사람들과 심지어는 동물과 자연을 포함한 환경과의 관계에서 창조해 내야할 어떤 것이다. 이 구절에 대한 그리스어 원문은 ‘엔톤 휘민’entōn hymin으로 ‘너희들 가운데’ 혹은 among yourselves란 의미다. 예수는 이 구절에서 천국은 장소나 시간이 아니라 관계關係라고 말한다. “천국은 너희 가운데에 있다”라는 말은 “천국은 관계다”라는 문장으로 해석할 수 있다.+
관계란 당사자들의 마음가짐에서 만들어지는 예술이다. 만일 한 사람이, 그 관계를 소홀히 여기거나 무시하고 의도적으로 파괴한다면, 그 관계는 망가진다. 천국은 양쪽 모두가 정성을 다하여 구축해야할 조각 작품이다. 만일 한쪽이 그럴 마음이 없다면, 관계가 무너진다. 이 파괴된 관계가 지옥地獄이다. 이 관계의 핵심을 유대인들의 해석방법인 미드라쉬적으로 부연 설명한 구절이 <도마복음서> 어록 3에 다음과 같이 등장한다. 다음은 콥트어 원문에 대한 번역이다.
1. 예수가 말했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가 너희에게 ‘보라, 왕국은 하늘에 있다’라고 말하면,
하늘의 새들이 너희들을 앞설 것이다.
2. 만일 그들이 ‘그것은 바다에 있다’라고 말하면 바다의 물고기가 너희들을 앞설 것이다.
3. 오히려, 왕국은 너희들 안에 있고 너희들 밖에 있다.
4. 너희들이 너희 자신들을 알게 될 때, (너희들은 알려질 것이며)
너희들은 살아계신 아버지의 아들들이라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5. 그러나, 만일 너희들이 네 자신들을 알지 못한다면,
너희들은 빈곤에 거주하게 될 것이며,
그 빈곤은 다름 아닌 바로 너희들이다.
이 어록에 대한 그리스어 번역은 대동소이하다 4행의 내용에서 ‘너희들은 알려질 것이며’라는 문장을 생략하여 “너희들이 너희 자신들을 알게 될 때, 너희들은 살아계신 아버지의 아들들이라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로만 나온다. 아마도 그리스어 번역본이 원문이며 콥트어 번역은 이 원문에 대한 장황한 번역인 것 같다.
예수는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이란 용어를 사용하여, 종교와 교리를 이용하는 종교지도자들, 권위와 법을 가장하는 정치지도자들의 어리석음을 지적할 참이다. 이들은 자기성찰이 없기 때문에 언제나 확신에 차있다. 위대한 리더의 표식은 자기의심과 주저인 반면, 어리석은 리더의 표식은 넘치는 자기확신과 확언이다. 어리석은 지도자들, <누가복음>에 언급된 바리새인들을 염두에 두고 말한다. 그들은 확신에 차, ‘왕국이 하늘에 있다’고 설교한다. 예수는 이들의 축자적인 해석을 해악적으로 반박하여, 만일 그들의 주장이 옳다면, 하늘을 나는 새들은 이미 천국에 살고 있다고 반문한다. 혹은 그들이 아무도 감히 가본적이 없는 깊은 바다에 천국이 있다고 주장한다. 예수는 그런 경우에는, 물고기가 이미 천국을 즐기고 있다고 반박한다.
<도마복음서>는 <누가복음>의 ‘천국은 관계에 있다’라는 문장의 의미를 파고들어가 그 핵심을 설명한다.
천국이 관계에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 당사자들 각자의 삶 안에 미리 존재해야한다. 그것을 “왕국은 너희들 안에 있고 너희들 밖에 있다”라고 말한다. 만일 내가 천국이 내 안에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다면, 나는 천국을 밖에서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자연의 섭리이며, 인식의 두 층위다. ‘안과 밖’은 구별된 것이 아니라, 밀접하게 연결된 하나다. 나의 외부 경험은 나의 내부 인식의 가감이 없는 표현일 뿐이다. 내 인식의 변화는, 마치 새로운 색안경을 장착하는 것과 같아, 나는 색안경의 색으로 세상을 볼 것이다,
“왕국은 너희들 안에 있고 너희들 밖에 있다”라는 문장은 인식에 있어서 개인, 집단, 혹은 우주적인 단계의 경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선언이다. 이 인식의 혁신적인 변화는 4행에 등장하는 문장에서 시작한다. “너희들이 너희 자신들을 알게 될 때, 너희들은 살아계신 아버지의 아들들이라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 문장은 철학의 시조 소크라테스의 깨달음과 같다. 인생에 있어서 궁극적인 물음은 언제나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며, 자신이 누구인가를 묻는 수련을 시작한 사람은, 매일 매일, 자신은 개인 자신일 뿐만 아니라 우주적인 자아라는 사실을 서서히 확인하고 확신한다. 인생에 있어서 빈곤이란, 자신을 육체를 지녀 본능에 쉽게 휩싸이는 연약한 존재라고 쉽게 생각해 버리는 무식이다. ‘자신을 아는 것’ 즉 ‘지기知己’는 깨달음의 시작이고 자신이 ‘하느님의 아들’ 즉 신성을 발휘해야할 존재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삶이 천국이다.
사진
<수감 중인 베드로>
네덜란드 화가 렘브란트 (1606–1669)
유화, 1631, 59 cm x 47.8 cm
예루살렘 이스라엘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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