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은 아직도 어제 머물러있는 자신을 일깨워 새로운 날을 준비하는 시간이다. 가만히 눈을 감고 내 자신을 응시하면, 어제라는 지나간 세월에 쌓아올린 바벨탑이 보인다. 바벨탑이 구태의연한 이유는, 어제의 성과를 자랑하고, 심지어 미래를 위한 좌표를 자처하기 때문이다. 바벨탑은 주위사람들이 보기에는 근사해 보이지만, 자신을 혁신하려는 수련도중의 인간에겐 과감하게 허물어 버려야할 구습이다. 새벽 여명은 그런 어둠을 불리치고, 지금-여기를 응시하려 그 날을 위한 새로운 전략을 짜라는 표식이다.
자신을, 1인칭의 눈이 아니라, 3인칭의 눈으로 응시하려는 인내와 용기가 있어야, 과거에 머물고 있는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 자기응시는 자신이 급하게 적어 내려간 논문 초안을 다시 보고 또 보아, 거기에서 발견된 오자와 탈자를 제거하는 훈련이다. 아직도 존재하지 않는 과거라는 시간과 공간을 연연해하고 그곳이 만들어낸 인상과 신념에 안주하려는 마음이 ‘무지無知’이다.
더 나은 자신으로 변모하기 위한 수련에 가장 중요한 발판이 ‘자기이해’다. 자기이해는 자신의 신체, 정신, 그리고 감정의 약점과 장점을 직시하여 언행의 기준을 삼는 삶의 태도다. 자기이해는 더 나아자 자신의 자연이나 우주로부터 동떨어진 존재가 아니라, 자신과 우주가 하나라는 인식이다.
파탄잘리는 이 행에서 인도영성을 이해하기 위한 핵심개념인 ‘아비드야’avidyā, 즉 ‘무식無識’을 다루고 있다. 무식은 깨달음을 방해하는 진부한 정신 상태인 ‘번뇌煩惱’의 기반이다. 무식은 무식이 뿌리를 내리고 자라나 결국 수행자의 나쁜 습관이 되고, 그 습관의 자동적인 반복인 ‘삼사라’samsāra의 궁극적인 원인이다. 무식은 지상의 모든 식물들이 자라는 들판과 같다. 그 토양에서 잡초, 벌레, 풀, 꽃, 나무들이 무성하게 자란다. 만일 무식을 제거하면, 번뇌도 사라진다.
파탄잘리는 5가지 번뇌를 언급했다: 무지無知, 내아內我, 집착執着, 혐오嫌惡, 그리고 생존욕生存欲. 그는 이 다섯 가지 번뇌가 인간의 삶에 등장하는 네 가지 유형을 구분한다. 다섯 가지 번뇌가운데, 무지는 다른 네 가지 번뇌를 자극하고 부양하는 토대다. 파탄잘리는 <훈련경> 4행에서 ‘무지’의 네 가지 유형을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अविद्या क्षेत्रमुत्तरेषाम् प्रसुप्ततनुविच्छिन्नोदाराणा
avidyā kṣetram-uttareṣām prasupta-tanu-vicchinn-odārāṇām
아비드야 크세트람-웃타레샴 프라슙타-타누-비친-오다라남
(직역)
“무지는 다른 것들의 들판으로 주도적이거나, 약하거나, 간헐적이거나, 혹은 완전히 활동적이다.”
(의역)
“무지는 요가수련자의 수련을 방해는 다섯 가지 훼방꾼들 중, 첫 번째이면서, 나머지 네 훼방꾼을 양산하는 토대이다. 무지는 다음 네 가지 양상으로 표현된다. 잠재적, 소극적, 간헐적, 그리고 언제나 대놓고는 적극적이다.”
첫 번째 무지한 자는 ‘잠재적’이다. ‘잠재적’을 의미하는 산스크리트 단어 ‘프라숩타’prasupta는 강세형 접두어 ‘프라’pra와 ‘잠자다’란 의미를 지닌 ‘스밥’svap의 합성어로 평상시에는 잠은 자고 있는 것과 같이 등장하지 않지만, 만일 깨어나 말을 하거나 행동을 한다면, 자신의 무지를 드러낼 수밖에 없는 사람을 지칭하는 용어다. 어떤 사람은, 그가 입을 열어 말을 하지 않거나 혹은 정제되지 않는 행동을 하지 않는 한 ‘괜찮은’ 인간이다. 그런 자에는 자신의 언행을 절제하는 침묵만이 그를 성숙한 인간으로 조금씩 변화시킨다.
두 번째 무지한 자는 ‘소극적’이다. ‘소극적’이란 의미를 지닌 단어 ‘타누tanu’는 ‘길게 잡아 늘어뜨리다’란 의미를 지닌 동사 ‘탄’tan에서 파생된 형용사다. 이런 자는, 위에서 언급한 다섯 가지 훼방꾼들이 약한 상태로 존재한다. 누군가가 부추기거나 자극한다면, 그는 부화뇌동하며 자신의 무식을 타인의 무식한 언행에 편승하여 표현하는 비겁자로 전락한다.
세 번째 무지한 자는 ‘간헐적’을 자신의 무식을 드러낸다. ‘간헐적’이란 의미를 지닌 단어 ‘위친나’vicchinnā는 강세접두어 ‘위’vi와 ‘자르다’란 의미를 지닌 ‘치드’chid의 합성어다. 그것은 마치 파도처럼 파고波高와 파저波底의 연속된 운동처럼, 삼매경을 찾지 못한 마음은 외부의 자극에 일희일비하는 얄팍한 마음의 상태다. 무지한 자는 자신이 나설때와 나서지 말아야할 때, 웅변해야할 때와 침묵할 때를 구별할 능력이 없어, 적절한 순간을 잃어버리고 우왕좌왕한다.
네 번째 무지한 자는 ‘대놓고 자신의 무식을 자랑하는 자’다. 이 무지의 상태를 의미하는 단어는 ‘우다라’udāra로 ‘밖으로’란 의미를 지닌 접두어 ‘우드’ud-와 ‘움직이다’란 의미를 지는 동사 ‘어르’ṛ의 합성어로, 자기도취에 빠져 자신이 지난 조그만 지식을 침소봉대하여 자랑하는 자다. 한 마디로 못 말리는 사람이다. 수전 케인의 2012년 책 <조용: 말하기를 멈추지 않는 세상에서 사는 내성적인 사람들의 힘>Quiet: The Power of Introverts in a World That Can't Stop Talking에서 서구사회는 외향적으로 항상 말과 행동을 주도하는 사람들을 이상적인 인간형으로 만들어, 내성적인 인간들이 지닌 가치를 잃어버렸다고 지적한다. 무지한 자는 과도한 언행으로 표현하지만, 지혜로운 자는 침묵과 절제로 자신이 의도한 뜻을 전달한다.
나는 내가 누구인가 알고 있는가? 아니면 모르는가? 나는 나의 무지를 어떤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는가? 내가 그런 무식을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는가?
사진
<물랭 드 라 갈래트의 무도회Bal du Moulin de la Galette, Montmartre>
프랑스 인상파 화가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1841–1919)
유화, 1876, 131 cm x 175 cm
파리 오르세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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