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0.29.(木曜日) “경계境界”


나는 오늘 어디로 갈 것인가? 내가 내딛는 발길이 내 인생의 목적지와 곧게 연결되어있는가? 이탈리아의 대문호이자 르네상스의 불씨를 당긴 알리기에리 단테(1265-1321)는 자신의 인생 한 가운데에 응시하고 그 안에 몰입하여 <신곡>을 남겼다. 단테는 <시편> 90편에 등장하는 “인간의 수명은 칠십이고 건강하면 팔십이다”라는 구절을 염두에 두고, 자신이 35세가 되던 해인 1300년, 자신도 아직 경험한 적이 없는 자신의 마음 속 깊은 곳으로 여행을 시작한다. 이 곳은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혹은 의식적으로 저지른 죄악이 적나라하게 쌓여있는 ‘지옥’이다. 단테는 자신의 마음속 깊이 자리 잡은, 무절제, 폭력, 그리고 사기라는 죄를 제거하지 않고는, 천국으로가 가는 정거장인 연옥으로 들어갈 수 없다. 단테의 ‘지옥’여행은 자신의 정신적이며 영적인 승화를 통해, 인류에게 자기 자신을 깊이 관찰하여 정화하는 방법을 제시하였다.

<신곡>의 지옥 편의 첫 절은 이렇다. “우리 삶의 여정의 한 가운데서”. 단테가 이 문장에서 표현하고 싶은 심정은 이렇다. “우리 모두는 인생이라는 여정을 떠난 사람들입니다. 여정은 기분 나는 대로 떠나 집으로 다시 돌아오는 여행과는 달리 자신이 정말 가고 싶고, 다시 돌아오고 싶지 않은 그런 장소를 향해 가는 마음가짐입니다. 내가 내디디는 한걸음 한걸음이, 목적지를 향해가는 방향이며, 동시에 목적지가 되기 때문에 감동스럽습니다. 여러분은 그런 목적지를 가지고 있습니까? 그 목적지를 가지고 있다면, 그곳을 향해 가고 있습니까? 그 여정을 떠날 장소와 시간을 알려드리겠습니다. 바로 지금, 여기입니다.” ‘이주’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자신에게 익숙한 환경과 결별하는 일이다. 이 결별을 통해, 자신이 열망하는 꿈을 실천할 수 있다. 단테는 자신을 완벽한 인간으로 만들기 위해, 자신의 죄가 겹겹이 쌓인 ‘자기마음’이라 불리는 지옥으로 과감히 여행하였다. 그런 솔직한 여행이야기는 인류의 고전이 되었다.

스위스 조각가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손가락을 가진 인간> (1947년)은 1960년대 제작한 <걸어가는 사람>과 함께 자코메트 조각들 중 가장 알려진 작품이다. 자코메티는 입체주의와 초현실조의 사상에 심취하면서 인간 심리의 깊은 곳을 탐구하여 표현하였다. 그는 인류최대의 비극인 세계2차대전을 경험하고 장-폴-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을 수용하여 작품을 남겼다. <손가락을 가진 인간>은 세계대전 후에 인간의 마음속에 등장한 사상과 신에 대한 의심, 그리고 인간의 소외를 숭고하게 표현하였다.

자코메티의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인간>은 그의 작품들 중에서 가장 노골적이다. 그의 커미셔너인 피에르 마티스는 조각의 이름을 ‘가리키는 사람’Man Pointing란 이름으로 순화하여 불렀다. 1947년에 완성한 1.8m 크기의 청동 조각상이다. 자코메티는 수많은 시도를 거쳐, 자신을 3인칭으로 관찰하고, 그 묵상의 결과를 적나라하게 표현하였다. 왼손으로는 표현되지 않은 다른 사람들 손짓으로 부른다. 그의 시선과 오른 손은 자신이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뚜렷이 향해있다.

그의 왼손은 자신이 인도하고자 하는 다른 사람을 쳐다보지도 않는다. 그는 자신이 가야할 길, 아니 인간이 가야할 길을 발견한 사람처럼 확신에 차있다. 그의 자신감은 중세 이탈리아의 시인이 ‘인페르노’로 들어가면서 노래했던 첫 곡의 첫 삼행에서 보인 자신감과 유사하다. “우리 인생이란 여정의 한 가운데서, 나는 내 자신이 어두운 속에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나 그 숲은 나를 위한 최선의 길이 숨겨진 장소입니다.” 그 길은 나를 위한 최선의 길일뿐만 아니라, 모든 인류가 가야할 유일한 길이기 때문에, 단테는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자신이 가는 거룩한 여정에 동참하라고 촉구한다. 그는 자신이 가야할 길을 감지했고 그 길을 묵묵히 걸아 갈 준비가 되어있는 구도자다. 그의 왼손은 몸 전체와 조화를 맞추어 한없이 빈약하지만, 그가 우리를 부르는 그 왼손은 당당하다. 마니 이 조각을 보는 내가 그를 따라 당장 거룩한 여정을 떠나야만 할 것 같다. 자코메티는 이 조각상에서 자신이 아닌 모델을 조각한 것이 아니라, 거룩한 여정을 자신 있게 시작하는 순간을 영원한 예술로 남긴 것이다.

그는 무심하게 정사각형 단壇에 서있다. 조그만 단이다. 이'단'은 중국황제가 제사를 드렸다는 북경의 ‘천단天壇’이나, 무함마드다 알라의 목소리를 들었다는 ‘히라 동굴’이 아니다. 자신이 지난 수 십년동안 자신이 표현하고자하는 대상에 대한 순간의 감각을 적나라하게 표현하려는 작업실이다. 그가 매일 매달린, 그 깨달음의 순간을 표현하기 위한 일상의 공간이다. 이 장소가 그에게 천단天壇이다. 천단은 내가 갈 수 없고 볼 수 없는 저 높은 하늘위에 있는 장소가 아니라, 자신이 매일매일 사는 바로 이 곳이다. ‘이곳’이 그리스의 델피신전이나 로마의 바티칸 성 베드로 성당보다 거룩한 이유는 자신이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나는 매일매일 내게 주어진 삶의 위대한 여정을 위해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최적의 삶을 열망하기 때문이다. 이곳은 이 ‘순간’이라는 세상에서 가장 가치가 있는 시간을 통해, 나를 혁신하기 위한 절대절명絕對絕命의 순간이기 때문이다. 단'은 또한 밤을 보내고 아침 해가 돋을 무렵(旦), 그를 훈련시키는 공간이다. 이곳은 특정한 공간으로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 그의 열망을 찾기 위해 다시 돌아오는(回) 공간이다.

그의 벌거벗은 몸은 비스듬하지만 그 조각상을 보는 나를 향해있다. 그의 성기, 그의 성기 같은 팔과 손가락. 이 모든 것은 자코메티 자신에 관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이상을 만질 수 있고 볼 수 있는 물질로 표현해야지만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런 자신감에선 성스러움과 상스러움이 하나가 된다. 아니, 그런 구별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자신이 몰입하여 표현하고 싶은 것을 자연스럽게 표현한 것일 뿐이다. 그의 왼발은 자신이 인도하려는 다른 사람을 향해있고 그의 오른 발은 이제 몸을 틀어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전환 중이다. 그는 가만히 서있지 않고 움직인다. 그는 자신이 선택한 거룩한 장소로 갈 것이다. 그는 자유롭다.

‘자유’(自由)는 자기 스스로가 원인이자 결과인 상태이다. 자신의 고유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이 자신의 깊은 성찰에서 나와 후회가 없는 삶의 스타일이다. 자유는 스스로 간절하게 원하는 바를 유유자적하면서 노닐 때 슬며시 자신의 모습에 드러나게 될 것이다. 자유(自由)가 자신이 원하는 바를 거침없이 행하는 자유(自遊)가 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가. 나는 어떻게 무심하면서도 고요하게 내가 원하는 바를 행하면서 살 수 있을까. 영어에서 ‘자유’를 의미하는 형용사 프리(free)는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할 수 있는 상태’ 이외에 ‘사랑의 빠진 상태’란 뜻이다. 자유는 외부의 어떤 것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이 수동적인 행위가 아니라, 자신에게 유일한 사랑을 찾아 그것에 빠지는 행위다. 자유로운 상태에서 만나는 존재를 프리와 같은 어원을 지닌 프렌드(friend), 즉 ‘친구’라고 부른다. 자코메티는 왼손으로 자신이 선택한 자유를 함께 만끽하기 위해 친구를 초대한다. 자유는 내가 내 목숨보다 사랑하는 대상이 있고, 그 대상과 일치가 될 때 모습을 드러내는 보물이다. 내가 사랑하는 나만의 노래를 부를 때 다가오는 내면의 친구다. 그 사랑은 외부의 눈으로 감지할 수 있는 내 밖에 떠도는 어떤 것이 아니라, 내 심장 안에 숨어있는 보물이다. 그것이 내게 보물인 이유는 내가 마음의 연못으로 깊이 내려가기로 결심하고 내려가면, 그것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자코메티는 왼손으로 자신이 가고자하는 방향을 손가락으로 그 ‘경계’를 정확하게 집는다. 그는 ‘경계적인’ 인물이다. 우리는 이 경계적인 인물을 ‘괴물’이라고 부른다. 괴물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 ‘몬스터(monster)’는 괴물의 의미를 좀 더 명확하게 전달해준다. ‘몬스터’라는 단어의 의미는 ‘한쪽과 다른 쪽을 구분하는 경계를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는 존재’라는 의미다. 몬스터는 나에게 익숙하고 게으른 과거로 돌아가라고 호통을 친다. 우리 대부분은 이 경계에서 작아진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소포클레스의 작품 <오이디푸스 왕>을 가장 위대한 비극으로 평가했다. 비극이란 우리에게 타락하는 주인공을 보여주면서, 우리 자신을 재현한 감동적인 이야기다. 이 비극에서 오이디푸스는 테베로 들어가려한다. 이 성문 앞에는 그 안으로 들어가려는 사람들을 막는 괴물이 웅크리고 있다. 이 괴물을 ‘스핑크스’라고 부른다. 그리스어 ‘스핑크스’는 새로운 단계로 무모하게 진입하려는 사람들의 ‘목을 조르는 존재’라는 뜻이다. 스핑크스는 괴물이기 때문에 어느 한쪽에 속해 있지 않은 하이브리드다. 머리는 인간, 등은 사자, 그리고 새의 날개를 가졌다. 스핑크스는 테베로 들어오려는 자에게 수수께끼를 낸다. 만일 그 문제를 풀지 못한다면 바로 목을 졸라 죽여 먹어치운다. 그러나 그가 문제를 푼다면, 성문을 통해 테베로 들어갈 것이다.

수수께끼는 이것이다. “한목소리를 가졌지만, 아침엔 네 발로 걷고, 오후엔 두 발로, 그리고 밤엔 세 발로 걷는 것이 무엇이냐?” 오이디푸스는 대답한다. “사람입니다. 어릴 때 네 발로 기어 다니고, 어른이 돼선 두 발로 걷고, 늙은이가 되어선 지팡이까지 포함하여 세 발로 다닙니다.” 오이디푸스의 대답을 들은 스핑크스는 당황한다. 그는 경계를 지키는 자로서 자신의 역할을 충분히 이행하지 못해, 자책감에 시달려 높은 절벽 위로 올라가 몸을 던져 자살한다. 한 단계에서 다른 단계로 넘어가기 위해 그 길을 막고 있는 스핑크스는 사실 오이디푸스 자신이었다. 스핑크스는 오이디푸스가 버려야 할 과거다. 새로운 여정을 시작한 오이디푸스가 반드시 거쳐야 할 통과의례가 있다 바로 자신이라는 괴물과 대면하고 그 괴물을 죽이는 일이다. 자코메티는 스핑크스다. 그는 자신을 3인칭으로 관찰하는 인간이 되기를 주저하는 인간들에 괴물이 되기를 자처한다. 그리고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누구냐?” 자신을 심오하게 관조하고, 자신을 위한 감동적인 길을 찾아 나선 현대인들에게 자코메티는 자신의 벌거벗은 몸으로 그 길을 제시한다. 자코메티는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을 알고 있습니까?”

사진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인간>

알베르토 자코메티

청동, 1947, 1.79m x 1.03m x 42cm

제네바 자코메티 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