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인가? 무엇이 1인칭인 ‘나’를 2인칭인 ‘너’와 불특정 다수인 3인칭인 ‘그(녀)’로부터 구분하는가? 나는 우연히 태어난 한국이란 국가의 국민이다. 국가, 도시, 가문과 같은 공동체는 자신들을 다른 공동체와 구분하고 구별시키는 특징들을 인위적으로 만든다. 이 특징들이 헌법, 관습, 규칙, 도덕과 같은 것들이다. 나는 나라는 정체성을 허락한 커다란 틀 안에서만 존재해야하는가? 나는 그 틀 밖에서 나를 만들 수 있는가? 내 공동체는 자유의지로 구축한 나를 포용할 것인가 혹은 억압할 것인가?
월트 휘트먼(1819∼1892)이란 미국 시인은 미국인들에게 가장 자신다운 정체성을 시로 발표하였다. 그는 빈농인 아버지와 퀘이커 교도였던 어머니 사이에 태어났다. 초등학교 5-6년 교육이 전부다. 11세부터 병원, 인쇄소, 신문사, 법률 사무소에서 사환으로 일하면서 인류의 고전과 경전에 심취하여 자신의 세계관을 형성하였다. 그 세계관은 후에 미국의 세계관이 되었다. 그는 미국과 미국인의 좌표를, 36세가 되던 해인 1855년, 첫 시집인 <풀잎>에 담았다. <풀잎>에 실린 첫 시는 <나 자신을 위한 노래>Song of Myself이다.
<나 자신을 위한 노래>는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나 자신을 찬양합니다. 내가 지닌 것을 당신도 지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게 속한 모든 원자原子가 당신에게도 속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빈둥거리며 내 영혼을 초대합니다. 나는 (땅에) 기대 편안히 빈등거립니다...(그러다) 여름 풀잎을 관찰觀察합니다.”
휘트먼은 서양 서사시 전통의 운율 형식을 따라 노래를 시작하지만, 그 내용을 파격이다. 그는 그리스 시인 호메로스처럼 뮤즈 신을 불어내거나 이스라엘 시인 다윗처럼 신을 들먹이지 않는다. 그에게 뮤즈이며 신은 바로 ‘자신’이다. 그래서 그는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과 같은 자기 자신, 예루살렘 성전과 같은 자기 자신을 찾아가 예배를 드린다. 그는 자신이 소유한 것을 타인도 함께 소유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나와 너를 구별하는 계층, 계급, 이념, 성별, 소유이란 경계가 허물어졌다. 이 새로운 ‘민주적 자아’가 팽창하여 2인칭, 3인칭, 그리고 우주 전체를 포함하는 그릇이 된다. 그에게 미국이란 국가는 심오한 자기의 확장이며, 그런 개인들의 집합체다.
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가? 인간은 본능적으로 쾌락을 추구하는 동물과는 달리 신적인 품성을 지향하는 그 무엇이 있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발견되길 기다리는 보석이다. 색이 바래지 않으며 모양이 변하지 않는 양심(良心)이다. 양심은 소유한 자가 그것을 소중하게 여겨, 갈고닦을 때 비로소 빛을 내기 시작하는 원석(原石)이다.
그 원석에서 내뿜는 찬란한 빛은 어둠을 걷어내고, 그가 항해하는 인생이라는 컴컴한 바닷길을 밝혀주는 등대다. 만일 인간이 자신의 심연에 존재하는 양심을 모르거나 무시한다면, 그는 타인이 정해놓은 규율에 쉽게 복종하며 노예로 인생을 살 것이다. 인간은 두 가지 마음으로 갈등한다. 하나는 타인에게 순응하려는 마음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양심에 복종하려는 마음이다.
르네상스 이후 서양에 등장한 ‘국가’라는 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이념에서 출발하였다. 국가는 그 구성원들의 안전을 위해 자신의 자유를 기꺼이 포기하는 개인들의 자율 공동체다. 그러므로 개인과 국가 간의 ‘사회계약’이 국가의 운명과 개인의 안녕을 위해 중요하다. 철학자 스피노자는 양심을 '우리 자신의 신(神)'이라고 불렀다. 양심은 개인의 독창성과 개성을 확인하고 자기 운명을 결정하며, 대중으로부터 자신을 구별하게 만드는 가치다. 대중이 편의상 제정한 법에 복종하려는 충동은, 개인을 집단 속으로 파묻어, 아무개로 전락시킨다. 그는 일생 타인의 행위와 생김새를 흉내 내고, 사회가 만든 도덕과 윤리에 맹종한다.
철학자 니체는 자신의 양심보다는 사회관습이나 법에 순응하는 심리를 '군중본능'(群衆本能)이라고 불렀다. 인간은 유전적으로 자신의 생존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군중에 영합한다. 군중이 가진 폭력이 개인의 힘보다 강하기 때문이다. 인류의 조상들은, 다른 집단과의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리더를 정점으로 위계질서를 마련한다. 대중은 무비판적으로 리더의 명령에 순응한다. 만일 누군가 리더의 명령에 항명(抗命)하고 자신의 양심에 순응한다면, 그는 추방당하거나 죽임을 당할 것이다. 순응이란 자신의 의지나 동기가 아니라, 권위를 지닌 자의 명령에 따른 행동이다.
개인의 양심은 인간의 욕심이라는 본능에 기초한 방종하는 마음과는 전혀 다르다. 양심은 욕심으로 가득한 자신을 응시해 유기해야 할 군더더기를 절제하고, 흠모할 만한 자신을 훈련할 때 서서히 만들어진다. 양심은 그 사람만의 개성을 만들어주는 DNA다.
미국의 초월주의 사상가 헨리 데이빗 소로는 1849년 <시민불복종>이란 에세이를 쓴다. 그는 정부가 개인의 양심과 선택을 지배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당시 동료인간들을 노예제도를 법으로 제정한 미국정부와 멕시코 땅을 빼기 위한 전쟁인 미국-멕시코 전쟁(1846-1848년)을 보면서 정부가 개인의 관계, 그리고 개인의 중요성을 미국시민에게 알렸다. 소로는 정부가 개인에게 유용한 적이 없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정부의 권력은 다수로부터 온다. 그러나 그 다수가 가장 정당한 정책이나 대안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시민들의 첫 번째 의무는 자신들이 생각하기에 옳은 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자유다. 개인 대수에 의해 강요된 법을 따는 것은 폭력이다.
국가나 정부가 불의할 때, 시민들은 그 법을 준수하기를 거절하고 정부로부터 스스로를 고립시켜야한다. 개인은 자신의 삶을 세상의 악을 제거하기 위해 헌신할 의무는 없다. 오히려 그런 악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켜야한다. 그는 정부의 혁신의 실효성을 의심했고, 변화를 위한 투표도 소용없다고 확신하였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세금을 내지 않기로 결정한다. 이 일로 그는 철장신세를 진적도 있다. 그는 스스로 정부로부터 스스로를 고립시켜 어떤 기관에도 참여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정부안에서 일하면서 정부를 혁신하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였다.
민주적자아는, 자신이 자신의 삶의 주인일 뿐만 아니라, 사회안에서 자신의 활동의 주체가 되어 난관을 헤쳐 나가는 인간이다. 우리는 필연적으로 도시와 국가 안에서 거주하며 보호와 혜택을 받는다. 과연 우리가 국가 안에서 살면서 인간답게 살 수 있는가? 우리는 인간으로 당연히 누려야할 자유와 평등을 국가 안에서 보장받을 수 있는가? 국가의 법이 개인의 양심보다 상위개념인가? 아테네 시민이 도시 안에서 누리는 혜택을 감안하여 자신에게 다소 불리하고 비도덕적이라도, 국가의 법에 복종해야하는 것인가? 국가와 개인의 이익이 갈등할 때, 우리는 어느 것을 선택해야하는가?
사진
<스피노자>
조각가 니콜라스 딩스
암스테르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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