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0.23.(金曜日) “허심虛心” (그리스어, ‘프토코스’ πτωχός)


그리스도교 경전 <복음서>에 등장하는 예수의 어록 중, 그리스도교인들 뿐만 아니라 인류에게 큰 울림을 준 가르침이 있다. 소위 산상수훈山上垂訓‘이다. 예수는 30세가 되어, 아버지 가업을 이을 ‘목수’ 혹은 ‘건축가’란 직업을 떠났다. 그는 인생의 새로운 과업을 찾기 위해, 당시 갈릴리 바다에서 ‘침례浸禮’라는 상징적인 의례를 통해 ‘회개’를 촉구하는 세례요한을 찾았다. 예수는 이 세례를 받는 과정에서 큰 깨달음을 얻는다.

예수는 “회개하라. 천국이 (이미) 와있다!‘라는 간결한 문장으로, 자신이 삶을 통해 어둠 속에서 갈 길을 찾지 못해 헤매고 있는 동료 유대인들에게 새로운 삶의 지침을 선언하였다. ‘회개’의 목적은 단순히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심연에 존재하는 ‘신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다. <창세기> 1.26에서 인간은 ‘신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고 기록한다.

예수는 자신이 신의 구별된 임무를 수행해야하는 운명을 순응하고 바로, 40일간의 수행을 시작한다. 성서는 이 40일간의 수행을 ‘시험’이라고 말한다. 예수는 악마가 아니라 성령에 이끌려 사막으로 가서 시험을 받는다. 시험하는 주체는 사탄이 아니라 하느님의 전령인 성령이다. 예수는 40일동안 금식과 묵상을 통해 자신의 일생의 과업을 깨닫고 갈릴리로 제자들을 선택하고 복음을 선포하시 시작한다.

예수는 갈릴리에서부터 자신을 따른 전국각지에서 많은 사람들을 보고 당황하였다. 예수는 이들에게 자신이 깨달은 진리를 정색을 하고 선언하기로 결심하여 산山으로 올라가기 시작한다. 경사진 산은 군중들이 모여 앉아, 예수의 선언을 효율적으로 경청할 수 있는 최상의 장소다. 산으로 올라간다. <마태오 복음>는 산의 이름과 장소를 말하지 않는다. 예수는 이 무명의 산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의 갖추어야할 가장 중요한 도덕과 윤리를 말한다.

<산상수훈>이 담은 숭고한 사상을 가장 널리 알린 사람은 역설적으로 간디였다. 간디는 <산상수훈>을 통해 비폭력운동의 핵심을 읽었다. 그가 18세 영국유학시절, 자신과 같은 채식주의자인 한 영국인을 맨체스터의 한 호텔에서 만났다. 그는 영국과 서양을 알기 위해서는 성경을 읽고 이해해야한다고 말했다. 간디는 성경을 읽어보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무명의 친구와의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 ‘구약성서’를 읽었지만, 재미가 없어 줄곧 잠에 들곤 했다. 그에게 <바가바드기타>나 <우파니샤드>처럼 한없는 영감과 환희를 준책은 복음서였다. 그는 <마태오 복음> 5-7장에 등장하는 ‘산상수훈’을 성서의 백미로 평가하여, 자신이 항상 읽는 경전으로 수용하여 일생 묵상하였다.

‘산상수훈’은 <마태오 복음> 5.48에 등장하는 결론처럼, 지상에서 잠시 사는 인간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완벽한 것처럼’ 완벽한 삶을 살기 위한 지침이다. ‘완벽한 삶’은 인생여정을 떠난 사람이 자신의 목적지를 분명히 깨닫고, 매일 매일 그 목적지를 향해 단호하면서도 겸손하게 걸어가는 일상이다. 이 복음서의 저자가 ‘온전; 완벽’을 위해 사용한 그리스 단어 ‘텔레이오스’τέλειος는 ‘숭고하고 궁극적인 목적’을 의미하는 ‘텔로스’télos에서 파생된 형용사다.

이 단어는 분명 예수가 사용한, 그래서 복음서 저자가 분명히 들었을 ‘셜림’šəlim이란 예수의 구어인 타르굼 아람어 단어의 번역일 것이다. ‘셜림’이란 유대인들이 흔히 인사할 때 사용하는 ‘샬롬’과 같은 어원이다. 이 단어는 원래 경제용어로 ‘채무관계를 청산한, 빚을 다 갚은’이란 의미다. 샬롬은 자신의 삶에서 자신이 완수해야할 의무를 알고, 그것을 완수했을 때, 다가오는 기쁨이다.

예수는 산중턱에 옹기종기 앉아있는 사람들을 보고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그들이 자신이 가야할 인생의 목적을 몰라, 길 잃은 양처럼 이리저리 헤매고 있기 때문이다. <산상수훈>은 길을 양들에게 들려주는 목자의 청아한 목소리다. 예수사상의 핵심은 이렇게 시작한다.

“영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태오 복음서> 5.3

이 문장에서 ‘영’이란 하느님이 혼돈가운데 창조할 때, 혼돈을 물리친 ‘강력한 바람’이란 ‘하느님의 영’이다. 복음서 저자는 그리스어 ‘프뉴마’πνεῦμα를 사용하였다. 이 단어는 분명 히브리어/아람어 ‘루아흐’rûaḥ의 번역이다. 이 영은 하느님이 진흙으로 인간을 창조한 후, 신적인 상징이자 영을 인간의 코에 불어넣은 입김이다.

‘영이 가난한 사람’은 누구인가? 이 문장은 사회정의에 경도되었던 루가의 해석처럼 ‘물질적으로 가난한’(<루가 복음서> 6.20) 사람이 아니다. 그(녀)는 자신을 응시하여 자신 안에 원래 내재한 ‘하느님의 영’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 영을 자신의 삶의 주인으로 삼는 영적인 자다. 그는 매일 새벽에 일어나, 마치 배고픈 사람이 음식을 찾아 헤매듯이, 영에 굶주린 사람이다. 그 영은 인간을, 동물이 아니라 신적인 자신으로 변모시키기 때문이다.

이 구절은 우리가 흔히 들은바 바대로, ‘마음이 가난하여’ 풀이 죽은 사람도 아니고 ‘가나한 사람’으로 세상에서 자신감은 잃은 사람도 아니다. 그는 오히려 매일 아침, 하루를 살기 위해 자신의 마음속에서 자신을 자신답게 만드는 신적인 영을 갈급해하고 찾아, 자신의 삶에 적용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이미 천국을 자신의 일상에서 사는 사람이다. 그는 광활한 마음의 소유자로, 그 마음에 신의 영을 매일 채우는 사람이다. 한마디로 ‘허심虛心’한 자다.

<마태오 복음서> 저자는 ‘프토코스’πτωχός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허심’을 표시한다. ‘프토코스’는 며칠 음식을 먹지 못해, 지나가는 사람에게 창피함을 무릅쓰고 음식을 구걸하는 걸인의 심정을 담은 단어다. 그가 구차한 이유는 먹을 것이 없거나 명성이나 권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자신이 회복하여 발휘해야할 영이 없기 때문이다. <마태오 복음서> 5.3을 다시 해설번역하자면 이렇다.

“행복한 사람은 이런 사람입니다.

그(녀)는 매일 아침, 자신의 영을 일깨우는 사람입니다.

그 영은, 신이 우주를 창조할 때, 혼돈을 물리친 바람이며,‘

그 영은, 진흙에 불과한 인간에게 살아있는 생명체로 전환시킨 호흡입니다.

당신은 그런 자신만의 영을, 몹시 배고픈 사람이 음식을 구하는 것처럼,

그것을 회복하려고 노력하셨습니까?

그런 사람만이 행복합니다. 그는 이미 천국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당신은 자신의 심연에 잠자고 있는 영을 일깨워 자신의 언행으로 표현하시겠습니까?

사진

<펜을 다듬는 작가>

네덜란드 화가 얀 에클스Jan Ekels the Younger (1759–1793)

유화, 1784, 27.5 cm x 23.5 cm

암스테르담 레이크스 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