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0.12. (月曜日) “독선獨善”


(10월 18일에 작성)

지난 주 금요일(10월 15일) 프랑스 파리에서 북서쪽으로 25km정도 떨어진 콩플랑생토노린 한적한 교외에서 문명사회에서는 일어나서는 안되는 끔찍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런 사건은 아무리 작은 사건이라도, 인류의 진보를 방해하는 걸림돌이기 때문이다. 이 교외 근처 중-고등학교에서 역사와 지리를 가르치는 47세 ‘사무엘 파티’가 비참하게 참수斬首당했다. 이 반인륜적인 행위를 한 광자狂者는 체첸공화국에서 지난 3월 프랑스로 이주해온 18세 ‘이슬람 근본주의자’ ‘압룰라 안쪼로프’였다.

나는 무슨 종교를 신봉하던지, 근본주의자들은, 종교인이 아니라 흉악범이라고 생각한다. 종교이름을 파는 흉악범들 때문에, 종교는 점점 인류공동체에서 자리를 잃고 사라질지도 모른다. 압둘라는 칼을 휘두르며 경찰과 대치하다 ‘알라후 아크바르’ 즉 ‘알라는 위대하다’를 외치고 사살되었다. 그는 할아버지, 남동생을 포함한 9명과 함께 사무엘을 가장 처참한 방식으로 공개처형하기를 오랫동안 모의해왔다.

이들은 이런 야만적인 결정을 이슬람 전통에 근거한, 유일하고 옳은 일이라고 맹신하였다. 무슬림들은 이런 결정을 ‘파트와’fatwa라고 부른다. 이슬람교의 창시자 무함마드가 죽은 후에, 무슬림들은 당황했다. 무함마드가 계시를 받아 형성된 ‘꾸란’의 내용을 자신들의 일상생활에 일어나는 다양한 상황에 적용하기 위해 다양한 법령法令들이 필요했다. 이슬람 학자들은 개인이나 사법기관이나 정부와 같은 단체의 다양한 질문들에 대해 ‘파트와’를 제정한다. ‘파트와’는 이슬람의 공시적인 법인 ‘샤리아’sharia와는 달리, 무슬림 개인이나 그 개인이 속한 종교집단의 인위적이며 작위적인 명령일 수도 있다.

프랑스의 대표적인 풍자 주간지인 <샤를리 에브도>Charlie Hebdo는 종교, 정치, 문화에서 굳건히 자리를 잡아 권력을 휘두르는 근본주의와 사이비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사무엘은 이 잡지에 실린 이슬람 창시자 무함마드에 관한 풍자만화를 ‘자신의 사적인 생각을 거리낌이 없이 표현할 수 있는 자유’ 즉 ‘사상표현의 자유’에 대한 수업 자료로 준비했다. 사무엘은 2015년에 이 잡지의 편집장이 이슬람과 무함마드를 모욕했다는 이유로 ‘파트와’ 수배의 대상이 되어 살해된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수업이 무슬림들에게 논란을 일으킬 것을 예상하여, 무슬림학생들에게는 자신의 수업에 결석을 허용하였다.

이 수업에 참석한 13세 여학생의 아버지라고 ‘거짓 주장’하는 자가, 자신의 ‘유-튜브’에 사무엘을 이슬람을 저해하는 ‘흉악범’으로 규정하고 그를 살해하는 행위를 정당화하는 ‘파트와’ 즉 신이 내린 명령으로 선언하였다. 사무엘은 근본주의 무슬림으로부터 살해위협을 받고, 자신이 매일 다니던 숲길을 지나는 퇴근길을 피해, 많은 사람들이 거주하는 대로를 이용하여 집으로 가고 있었다. 신의 명령을 받았다고 착각한 압둘라는 자신이 준비해온 30cm나 되는 칼로 그를 살해하고 그의 목을 잘라 대로에 내동댕이쳤다. 누가 감히 이런 반인류적인 행위를 확신을 가지고 저지를 수 있는가?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이런 만행을 막을 길은 없는가?

종교인들의 가장 큰 적은 바로 자기-자신이다. 자신이 우연히 경험한 종교가 자신에게만 최선일 뿐만 아니라, 타인에게도 최선이어야 하고, 그것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독선’獨善이다. 독선은 종교를 이데올로기로 전락시킬 뿐만 아니라, 사회의 근간인 배려와 친절을 저해하는 해악으로 변질시킨다. 독선은 ‘무식’의 상징이다. 무식은 학교를 다니지 않아 글을 읽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아는 조그만 지식이 최고라는 착각이자 성급한 열등의식이다.

무함마드는 이슬람 종교 이전의 시대(632년)를 ‘무식의 시대’라고 불렀다. ‘무식’은 고전 아랍어로 ‘자힐리야’jahiliyyah다. 자힐리야는 기원후 7세기 이슬람이 등장하기 전 아랍사회를 지칭하는 용어이기도 하다. 자힐리야에는 다음 두 가지 특징이 있다. 하나는 ‘성급한 분노’다. 무식한 사람은 쉽게 화를 낸다. 그(녀)가 화를 내는 이유는, 자신이 구축한 이상적이며 이성적인 세계관에 상대방이 쉽게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당면한 문제를 자신이 입장뿐만 아니라, 상대방 입장에서 역지사지하는 수련을 해본 적이 없이 성급하게 판단하고 자신의 협소하고 치졸한 시선으로 상대방을 무시하고 가르치려한다. 또 다른 하나는, 자신의 편협한 독선에 동조하는 사람들과 연대하여, 자신과 다른 의견을 지닌 사람에게 ‘정의’란 이름으로 ‘폭력’을 행사한다. 이런 행위를 일삼는 근본주의자들은 이런 무식한 폭력을 ‘정의正義’라고 말한다. ‘공정’과 ‘정의’를 들먹이는 사람은 대개 정의롭지 못한다. 정의로운 행위를 일삼는 사람이 정의롭다.

무함마드와 동시대에 사막에 거주하는 베두인들은 성급한 분노와 폭력행위를 일삼았다. 무함마드는 그런 무식의 행위를 중단하고, 묵상과 자비행위를 근간으로 삼는 새로운 삶의 윤리를 선언하였다. 이 삶의 철학이 ‘이슬람’이다. ‘알라는 위대하다’라고 외치면서, 사무엘을 참수한 압둘라의 행위는, ‘이슬람’ 행위가 아니라, 이슬람이란 종교를 이용하여 근본주의자들의 정치행위다. 그의 행위는 무함마드가 그렇게도 혐오하고 극복하려고 노력했던 ‘무식한 행위’다. 이 무식한 사건은 COVID-19시대에 생존의 위협을 받고 있는 종교가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묻는다. 종교가 이 시대에 생존할 것인가? 그 무식한 독선을 고집하는 종교는 추풍낙엽처럼 사라질 것이다. 나는 독선하는가? 아니면 타인의 입장에서 세상을 보려고 노력하는가?

사진

<간음하다 잡힌 여인>

독일 화가 루카스 크라낙 (1515–1586)

유화, 1532, 84 cm x 123 cm

러시아 생 피터스부르그 에르타미주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