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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11.(日曜日) “당신은 스스로에게 저지른 만행萬行을 관찰하셨습니까?”


인간이 자신이 지금하고 있는 행위에 대한 이유를 안다면, 그는 깨어있는 자다. 그(녀)는 그런 행위를 욕망이나 본능을 통해 하는 것이 아니라, 숙고를 통해 자기 변화를 위한 ‘의도한 연습’의 한 과정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지 못한다면, 그것을 옆에서 듣고 보는 주변 사람들도 그 언행의 적당성과 정당성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하루는 내가 표현한 언행을 숙고하고 완수하는 수련과정이다.

예수는 사랑이 동물인 인간을 신적인 인간으로, 야만적인 인간을 문화적인 인간으로 개조하는 유일한 가치란 사실을 깨달았다. 사랑은 동물적인 쾌락을 만족시키기 위한 몸부림이 아니라, 교육을 통해 숭고한 자신을 드러내는 원동력이다. 1세기 유대인들은 신이 자신들이 건축한 건물 안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공적인 삶을 시작하면서, 제일먼저 장사판이 된 예루살렘 성전을 부수고 삼일 만에 다시 건축하겠다고 말했다. 성전은 땅에 짓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세우는 것이다. 성전이란 오래된 자아를 유기하고, 새로운 자기-자신을 세워야할 인간의 마음이다. 보이는 건물 안에 신이 존재하고, 기록된 경전과 그것을 해석해온 학자들의 해석만이 신의 모습이라고 신봉하던 유대인들은, 그런 예수를 십자가 처형하였다. 골고다 언덕에 꽂혀있는 십자가 위해서 사람들을 보고 외친다. “저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을 잘지 못합니다.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신에게 기도하였다.

나는 오늘 사람들 앞에서 쏟아 놓을 언행이 무슨 결과를 초래할지 알고 있는가? 인도를 통해 인류에게 전달된 가장 영적인 시인 <바가바드기타>은 그와 물음으로 거대한 서사시 <바가다드기타>를 시작한다:

dhṛtarāṣṭra uvāca

드리타라슈트라가 말했다.

dharmakṣetre kurukṣetre samavetā yuyutsavaḥ

“그들이 쿠루의 들판, 즉 다르마의 들판에 전투를 치룰 목적으로 모였을 때,

māmakāḥ pāṇḍavāś caiva kim akurvata sañjaya

산자야여! 나의 군대와 판두 아들들의 군대는 자신들에게 무슨 일을 저질렀는가?”

<바가바드기타> 제1권 1단락

드리타라슈트라dhṛtarāṣṭra는 ‘쿠루’라는 나라의 왕이며 장님이다. 위대한 경전과 고전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직업은, 그들이 상징하는 가치에 대한 상징이자 은유다. ‘장님’이란 장님에 관련된 특징을 상징하는 단어다. 장님은 실제로 앞을 볼 수 없는 신체적인 장애를 지닌 자이지만, 경전에서는 사리분별 능력이 없는 자란 의미한다. 주위 사람들은 그가 장님이란 사실을 알고 있지만, 정작 자신은 아무것도 볼 수 없기 때문에, 원래 세상이 암흑뿐이라고 착각한다.

드리타라슈트라는 사람들이 모두 흠모하는 권력, 명예, 그리고 부를 가지고 있지만, 정작 자신은 장님이다. 자신에게 맡겨진 역할을 인생이란 무대 위에서 최선을 다해야할 ‘역할’이라고 여기지 않고 쾌락을 위한 도구로 여긴다. 왕이라는 직함이 그를 점점 장님으로 만들었다. 왕이란 직함이 오히려 그를, 권력, 명예, 그리고 부를 남용하는 어리석인 자로 전락시켰다. 그는 육체적인 장님일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장님이다. 그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신하이며 현자인 산자야Sanjaya에게 물을 수밖에 없다. 산자야는 사태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지혜의 소유자다. 그는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개안開眼된 자다.

드리타라슈트라가 치리하는 나라 ‘쿠루’라는 나라는 이기적인 욕망과 그 안에서 탄생한 시기, 질투, 그리고 악의에 대한 은유다. 그의 자녀들은 자신의 욕망을 억제하지 못하고 외부의 자극에만 본능적으로 반응하는 어리석은 자들이다. 그들이 수련을 통해 자신을 자제하고 정신적으로 고양된 의로운 판두Pandu의 아들들과 전쟁을 벌일 참이다. 이들은 ‘쿠루크세트라’라는 평원에 모였다. 쿠루크세트라는 실제 지명으로 델리 북쪽에 위치한 펀잡에 위치한 조그만 평원이다. 쿠루의 군대는 판두의 아들들과 전투를 치루기 위해 진열중이다. 드리타라슈트라는 산자야에게 누가 이 전쟁에서 이길 것인가를 묻는다.

이 질문은 은유적이다. 영적인 수련을 통해 자기-실현을 이루고자 훈련하는 장님 수련자(드리타라슈트라)는 자신의 언행을 지켜보고 조언해줄 스승(산자야)이 필요하다. 그는 자신이 하루 동안 입을 통해 나오는 말, 그리고 손발과 몸을 통해 저지른 행동을 점검하면서, 그 이상적이며 현명한 스승에게 검점을 받는 다. 산자야는, 정직하고 공평한 숙고를 통해 왕의 언행을 분석하고 그 마음속에 용호상박하는 두 가지 마음을 객관적으로 평가한다. 그것은 두 가지 상반된 가치로, 즉 절제와 탐닉, 지적인 결심과 감정적인 충동, 명상을 통한 영적인 혜안과 그것을 거부하고 방해하는 정신적인 저항, 그리고 신적인 자아인식과 이기적인 본능에 쉽게 끌려가는 무식과의 대결이며 전쟁이다.

이 두 가지 마음이 대결하는 장소가 ‘쿠루크세트라kurukṣetra’다. ‘크세트라’는 ‘들판; 평원’, ‘쿠루’는 ‘행동하다’라 의미를 지닌 동사 ‘크르’에서 유래했다. ‘쿠루크세트라kurukṣetra는 드리타라슈트라가 다스리는 왕국이면서 동시에 인간이 육체적, 정신적 그리고 영적인 기능이 작동하는 들판이란 뜻이다. <바가바드기타>(BG)에서 ‘쿠루의 들판’은 동시에 ‘다르마의 들판’이란 의미를 지닌 ‘다르마크세트라dharmakṣetra’라고도 불린다. ‘다르마’는 ‘정의; 덕; 거룩’이란 의미로 ‘다르마크세트라는 ’정의가 실현되는 들판‘이라는 뜻이다. 인간에게 하루는 자신의 덕을 닦는 전쟁터다.

‘쿠르의 들판’은 생계를 위한 세속적인 책임과 활동을 의미하고 ‘다르마의 들판’은 자기실현을 위해 영적인 훈련과 활동이다. 이 두 장소는 해탈을 원하는 수련자의 마음속에서 우위를 차지하려고 경쟁하는 두 가지 마음이기도 하다. 인간의 마음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붓디’buddi라는 ‘깨달음’ 혹은 ‘깨우침’과 다른 하나는 오감을 기반으로 형성된 ‘마나스’manas라는 ‘마음’이다. 순결하고 분별력이 있는 깨달음은 ‘붓디’는 BG에서 비유적으로 ‘판두의 아들들’이다. 판두는 영웅 아르주나Arjuna와 그의 네 형제들의 아버지다. 이 다섯 형제는 ‘자기실현’을 위해 외부로 향한 생각을 제어하고 자기 자신에게 온전히 몰입하는 ‘니브르티’nivritti를 수행하는 자들이다. ‘판두’Pandu라는 산스크리트어 단어는 ‘백색’을 의미하는 ‘판드’pand에서 파생한 단어로 인간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존재하는 한없이 빛나는 영적인 지식을 의미한다.

‘마나스’는 장님 드리타라슈트라와 그의 100명의 아들들을 상징한다. 이들은 자기실현이 목적이 아니라 자신이 아닌 다른 것을 쟁취하는 경쟁하고 오감을 만족시키는 ‘브라프리티’pravritti의 삶을 추구한다.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으로 구성된 ‘마나스’는 인간을 외부의 자극에 자연스럽게 이끌리게 만드는 자석이다. ‘마나스’가 발생하는 장소를 인간의 뇌에서 굳이 찾는다면, ‘폰스 바롤리’pons Varolii다. 이탈리아 해부학자 코스탄쪼 바롤리오 Costanzo Varolio (1543–75)의 이름을 따 ‘바롤리의 다리’ 혹은 ‘뇌교腦橋’로뇌간腦幹의 일부다. 뇌교는 소외와 골수 사이에 위치하여 오감으로 감지한 정보를 신경계를 통해 신체의 각 부분에 내보는 운동신경이며 연결고리다. 인간은 진선미를 추구하려는 영혼인 ‘붓디’를 소중하여 여기고 수련하지 않으며, 외부의 자극에 끊임없이 휘돌아 치는 ‘마나스’의 노예가 되어 자극이 만들어낸 허상인 ‘마야’maya속에서 길을 잃은 지도 모르고 헤맨다.

쿠루의 왕 드리타라슈트라는 ‘마나스’의 지배를 받는 ‘마야’의 왕이다. 그의 이름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려준다. 그의 이름은 ‘사로잡힌’이란 의미를 지닌 ‘드리타’dhṛta와 ‘왕국’을 의미하는 rāṣṭra의 합성어로 그 의미는 ‘권력욕에 사로잡혀 왕국을 다스리는 자’란 의미다. 그가 탄 전차는 ‘마나스’을 의미한다. 몸은 전차이고 영혼은 전차의 주인이며, 깨달음은 전차를 모는 전사이고 오감은 말이다. 인간의 마음이 장님이 이유는 오감이나 이성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전사가 판단한 장소로 가기 위해 말은 항상 제어되어야한다.

‘산자야’만이 전차가 가야할 길을 알고 있다. 이기심에서 벗어난 그는 사물과 사건을 있는 그대로 분명하게 보기 때문이다. 그는 신적인 통찰력의 상징이며 자기실현을 완수하고 싶은 수련자다. 그는 외부를 판단하기 전에 외부를 판단하는 자신을 먼저 분석하고 숙고한다. 그는 스스로 별도의 공간에서 자신을 볼 수 있는 고독의 상징이며 삼라만상을 편견이 없이 관찰하고 사심이 없이 판단한다. 숙고는 통찰의 힘으로, 대상을 보고 반응하는 자신을 깊이 보는 능력이다. 숙고는 계산하는 것이 아니다. 숙고는 직감으로 분명하고 선명하게 느낀다.

드리타라슈트라는 산자야에게 질문한다.

kim akurvata sañjaya

“산자야야! 그들이 자신들에게 무슨 일을 저질렀느냐?”

왕은 지금 눈앞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과거에 인도 북부 펀잡의 ‘쿠르크세트라’ 평원에서 일어난 역사적인 전투를 지칭하고 있다. 브야사는 ‘아쿠르바타’akurvata라는 동사형을 사용하였다. ‘아쿠르바타’는 ‘하다’란 의미는 지닌 어근 의 ‘3인칭 복수 과거 중간태’를 사용하였다. ‘했다; 저질렀다’라는 의미다. 우선은 시제가 현재가 아니라 과거다. 만일 그들 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라면 현재중간태인 ‘쿠르바테’kurvate 혹은 현재능동태인 ‘쿠르반티’kurvanti를 사용했을 것이다.

왕은 “산자야야! 그들이 지금 무슨 일을 저지르고 있느냐?”라고 묻지 않았다. 만일 브야사가 현재형 동사를 사용하였다면, 그 사건은 오늘의 시점에서 지나가 버린 과거일이다. 그러나 브야사가 과거형 동사 ‘아쿠르바타’를 사용하여, 현재 일상에서 계속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계속 관찰하고 숙고하고 있다는 마음가짐을 표현하였다.

‘아쿠르바타’는 능동형도 수동형도 아니, 중간태다. 중간태동사의 주어는 동시가 그 동사의 목적어가 될수도 있다. ‘킴 아쿠르바타’는 ‘그들이 자신에게 무슨 짓을 저질렀는가?’란 의미다. 오감의 자극을 위해 사는 사람은 자신이 하는 일이 선하고 의로운 일이라고 착각한다. 만일 수련자가 자기완성을 위한 각성수련을 하지 않는다면, 그가 아무리 정의롭고 선한 일이라 할지라도, 그 일은 스스로에게 해를 끼치게 된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매순간 ‘붓디’와 ‘마나스’의 전투를 벌이고 있다. 자기가 누구인줄 모르고 자기실현의 수련을 하지 않는 사람들의 행위는, 자신들에게 해가 되는지 모른다. BG는 아직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들을 깨우치기 위한 아름답고 장구한 시다. 그리고 이 서사시를 읽는 나에게 되묻는다. “당신은 스스로에게 저지른 만행萬行을 관찰하셨습니까?”

사진

<싸우는 아이들>

독일작가 빌헬름 트뤼브너 (1851–1917)

유화, 1872

독일 하노버 Lower Saxony State Mus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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