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0.1. (木曜日) “두고 보세요. 거듭날 겁니다.”


지난 수요일(9월 30일) 밤, 한 방송에서 COVID-19으로 심신이 지친 국민들을 위로하는 비대면 콘서트를 열었다. 그는 15년 만에 방송출현하면서, 자신이 그동안 갈고 닦아 예술의 경지에 보여주었다. 신은 그에게 ‘가수’라는 운명적인 임무를 주어 이 세상에 보냈다. 그는 그 구별된 임무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다. 54년간 무대 위에서 노래를 부른 베테랑이었지만, ‘프로’답게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프로’는 자신이 올라선 무대를 인생의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마치 단두대에 올라선 사형수처럼 임한다. ‘아마추어’amateur라는 말의 어원은 ‘진실로 그 대상의 결과에 상관없이 즐기고 사랑하는 사람’이란 뜻이다. 그러나 ‘프로’인척하는 ‘아마추어’는 어제의 자신을 반복한다. 자신에게 감동적인 노래가 아니라, 관객이 좋아할 만한 노래를 부르면 아첨한다. 그런 사람은 구태의연한 어제를 반복하기에 급급하다.

그는 이 무대를 준비하는 동료들에게 “연습演習만이 살길이다”라고 말하면서 독려한다. ‘연습’은 실전일 수밖에 없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삶을 연극무대에 비유하여 <시학>이라는 책에서 인간문화의 정수를 글로 남겼다. 그는 그리스 비극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비극悲劇은 연습演習에 대한 재현再現이다.

그것은 심각深刻하고,

목적과 수단이 합일合一하고

또한 압도壓倒적이다.”

우리는 모두 인생이란 무대에 오른 배우다. 배우는 가장 먼저, 자신에게 맡겨진 유일무이한 배역을 알아야한다. 그 배역을 모른다면, 인생이 낭패다. 우리는 흔히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선택한 직업이 나의 배역이라고 착각한다. 배역은, 자신이 목숨을 바칠 수 있는 거룩한 임무다. 나훈아는 말한다. “국민을 위해 목숨을 바친 왕이나 대통령을 본적이 없다.” 그 이유는 대통령이 자신에게 주어진 배역의 의미를 잘 모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상인으로, 어떤 사람은 운동선수로, 어떤 사람은 예능인으로, 어떤 사람은 위정자라는 배역을 맡는다. 각자가 맡는 배역에 몰입하는 것이 행복이고 권력이다.

자신이 맡은 배역을 훌륭하게 완수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고, 나훈아 삶의 모토인 ‘연습練習’이다. 배우는 먼저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과 그 역할을 완벽하게 실행하기 위해 끊임없이 연습해야한다. 만일 ‘대통령’의 배역을 맡은 자가 권력만을 유지하기 위해 비굴하게 연기한다면, 자신뿐만 아니라 그를 믿고 따른 국민에게도 불행이다. 국가라는 연극무대 전체가 실패로 끝날 것이다. 자신의 역할을 모르고 연기하는 배우처럼 안쓰러운 사람은 없다. 그런 사람이 그 역할에 몰입할 리가 없고, 몰입이 가져다주는 신명을 불러일으키지도 않는다.

자신이 해야 할 유일무이한 배역을 아는 사람은, 그것이 되기 위해 목숨을 바쳐 ‘연습’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사용한 ‘프락시스’praxis라는 단어를 우리는 ‘연습’으로 번역하였다. ‘프락시스’는 처음과 마지막, 원인과 결과를 하나로 만드는 예술이다. 배우에게 ‘연습’이란 ‘실전’이며, 자신이 간절히 원하는 그것을 지금, 이 순간, 이곳에서 온전하게 쏟아놓는 초인적인 수고다. 연습이란 저 하늘에 높이 떠있는 별을 따서 자신의 가슴에 심어놓는 용기이며 정성이다. 인생은 자신에게 맡겨진 배역을 빛나게 만드는 무대다.

나훈아는 자신의 역할을 잘 모르는 한 방송국을 “모르긴 몰라도, 거듭날 겁니다”라는 말로 넌지시 나무라고 격려한다. 인간은 부모를 통해 동물로 태어나고, 인생이란 무대에서 자신의 배역을 발견하고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거듭난다. 이렇게 거듭난 사람은 ‘자유自由롭다’다.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 말미암는 이유는 자신에게서 찾는다. 만일 누가 그의 자유를 침범한다면, 그 대상이 최고 권력자라 할지라도, 그의 명령이나 부탁을 단호히 거절할 것이다. ‘자유’는 외부의 구속으로부터 탈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닮고 싶은 별이 되기 위해 끊임없이 정진하는 노력이기 때문이다. 나훈나의 연기는, 가수라는 직업을 통해, 자신의 개성을 마음껏 발휘하여 저 하늘의 별이 얼마나 빛날 수 있는지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의한 비극의 특징 세 가지를 모두 가졌다. 첫째, “심각深刻”하다.

‘심각’이란 자기 자신을 위해 한없이 높은 기준을 설정하고, 그것을 완수하기 위해 한 치의 흔들림이 없는 헌신적 노력이다. ‘심각’이란 어두운 얼굴 표정을 짓는 것이 아니라, 10년 후 내 자신에게 감동적인 나를 위해, 저 하늘의 별을 가슴 깊이 ‘깊이 새기는“ 각고의 노력이다. 나훈아의 연기는 온갖 하찮은 웃음거리가 난무하는 대한민국에서 정색을 알려주었다. 둘째, “목적과 수단이 하나다.” 오늘이 인생의 처음이자 마지막이며, 내가 지금하고 언행이 나의 유언이다. 그런 사람은 자유롭고 카리스마가 넘친다. 지금 자신이 하는 일에 연연 해 하지 않는다. 김동건 아나운서가 언제까지 가수활동을 하겠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나훈아의 대답을 허를 찌른다. “이제는 내려올 시간이라 생각하고, 그게 길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는 하루를 인생의 마지막 날처럼 종말론적으로 살고 있다. 셋째, ‘압도壓度적’이다. 압도적인 사람은 두려운 것이 없다. 두려운 것이 있다면, 자신이 최선을 경주하지 않아 이루질 못할 자신에 대한 후회뿐이다. 압도적인 사람은 “나는 나”인 사람이다. “나는 나”인 사람은 자신이 맡는 배역인 ‘나’를 위해 오늘을 헌신하는 사람이다.

나는 스스로에게 질문한다. “당신은 두고 볼만 합니까?” “당신은 다른 인간으로 거듭날 것입니까?” “당신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습니까?”

사진

<공연가수>

미국 사실주의 토마스 에이킨스(1844 – 1916)

유화, 1892, 1,909.57 mm x 1,378.97 mm

필라델피아 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