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3. (日曜日) “시인是認”


일 년 전, 우리의 허락도 없이 등장하여 일상을 정지시킨 불청객 COVID-19가 아직도 우리의 안방 아랫목을 차지하고 떠날 생각이 없다. 우리는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면, 이 불청객이 스스로 물러날 것이라고 착각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스스로 진화하여 우리가 상상하지도 못하고 준비할 수도 없는 모습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과학자는 자신들이 아직 완전히 파악할 수 없는 이 괴물怪物을 ‘변종바이러스’라고 부른다.

괴물은 경계를 지키고 표시하는 존재다. 그 경계를 통해 다른 단계로 진입하고자하는 인간을 시험한다. 고대 그리스 비극에 등장하는 주인공 오이디푸스가 정처 없이 떠돌다가 자신의 고향 ‘테베’로 진입할 때, 괴물 스핑크스가 등장한다. 스핑크스는 고대 그리스어로 ‘목을 졸라 죽이는 자’란 뜻이다. 이 괴물은 그 경계를 통과하려 새로운 운명의 길로 들어서는 사람에게 항상 다음과 같은 동일한 질문質問을 던진다. “아침에는 네발로 걷고, 점심에는 두발로, 그리고 저녁에는 네발로 걷는 존재는 무엇이냐?”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질문에 대답하는 못하는 이유는, 이 질문의 핵심에 몰입하지 못하고, 그 ‘정답’을 다른 사람을 통해 얻으려는 비겁 때문이다.

인간은 유아시절 네발로 걷는다. 자신의 눈앞에 떨어진 약간의 권력, 돈, 그리고 명예에 눈이 멀어 짐승처럼 킁킁거리며 산다. 그(녀)의 경쟁자는, 자신과 자웅을 겨루는 이웃이다. 이 약육강식의 경기장에서 상대방의 도태가 나의 성공이다. 유아적인 인간은 사실 인간이 아니라 짐승이었다. 자신의 알량한 다양한 형태의 쾌락을 충족시키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그의 이런 언행은 습관이 되고 중독이 되어, 좀처럼 이 소용돌이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특히 타인과의 경쟁 교육을 일삼는 학교교육은, 그런 이기적인 삶을 고착화한다.

인간은 청년시절 두발로 걷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인간이 된다.’ ‘두발로 걷는 행위’는 자립이다. 그는 비로소 ‘스스로 교육하기’를 시작한다. 그는 자신이 가야할 길을 찾기 위해 자신에게 찬란한 목표를 스스로 지정한다. 그는 고개를 들고 이 지점에 시선을 고정하고 두발로 걷고 정진하기 시작한다. 학교에서는 타인이 경쟁자이지만, ‘자기교육’에서는 과거의 자기-자신이 유일한 경쟁자이자 극복의 대상이다. 그는 조용히 자신과의 경쟁을 통해 더 나은 인간으로 거듭나도록 수련시킨다. 그의 눈은 더 이상 주변에 있는 동료인간이 아니라, 저 높은 곳에 있는 자신이 흠모하는 자기-자신이다.

자기교육의 시작은, 어제의 자신에 대한 회한과 다시는 그런 언행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결심이다. 자신의 잘못을 적나라하게 고백告白하여 인류 최초의 자서전을 쓴 성인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론>에서 자신의 치부를 적나라하게 기록하였다. 그는 자신의 잘못을 만천하에 시인是認한다. 소년 시절 과수원에서 배를 훔친 절도사건, 이단으로 정죄된 사교인 마니교 교리에 심취하여 활동한 시절, 일생 섹스에 대한 병적인 집착, 그리고 성공에 대한 욕심... 그는 자신의 부끄러운 삶을 명명백백하게 기록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이렇게 자세하게 고백한 이유는 다시는 그런 잘못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자신과의 약속이자 결심이다. 이 고백이 그를 승화된 인간으로 도약시킬 것이다.

그런 고백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뻔하다, “예수의 조상”이라 가장 위대한 리더로 추앙받는 인물이 있다. 바로 고대 이스라엘의 왕 다윗이다. 그는 12지파로 사분오열한 이스라엘 민족들을 화합시키고, 이들이 모두 인정할 수 있는 전략적인 장소에 도시 예루살렘을 건설하였다. 당시 이스라엘인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이방민족들과의 전쟁, 특히 블레셋 민족의 거인 골리앗을 물리치고 승승장구하였다. 신은 부귀영화를 누리는 성공적인 지도자에게 치명적인 병을 심어놓는다. 바로 ‘오만傲慢’이다.

일생을 야전사령관으로 지낸 다윗이 오만에 빠졌다. 다윗은 들판에서 다른 부하들과 진을 치고 다른 민족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데, 그는 예루살렘 궁궐에서 빈둥거린다. 다윗은 자신이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않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오른팔인 요압 장군을 전투에 투입시켰다. 다윗이 이젠 젊은 시절의 활력을 잃고 궁궐에서 뒹굴며 부인과 수많은 첩들과 함께 아이들의 재롱을 보는 ‘할아버지’가 되었다. 골리앗의 머리를 자르던 야심찬 다윗과는 사뭇 다르다.

어느 날 저녁, 다윗은 잠깐 눈을 붙였다가 일어나, 왕궁의 옥상에 올라가서 거닐었다. 오만한 인간에겐 일상의 무명의 시간이 일생일대의 최대 위기다. 그는 한 여인이 목욕하는 모습을 옥상에서 내려다보았다. 여인은 아주 아름다웠다. 그 순간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을 자신도 모르게 남용濫用하기 시작한다. 자신의 말 한마디로, 그녀를 자신의 침대로 데리고 올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그녀가 이스라엘 군대 장교인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란 사실을 알았지만 그녀를 궁궐로 데려와 간통하여 임신시킨다.

다윗은 부하의 부인이 자신과 정을 통해 임신한 사실을 숨기기 위해 더 큰 범죄를 저지른다. 그는 요압장군과 짜고 국정을 농단한다. 요압장군은 우리야를 전투가 가장 심한 최전선에 배치하여 전사하게 만든다. 그런 후, 다윗은 뻔뻔하게도 밧세바를 궁궐로 들여 첩으로 삼는다. 지도자의 실수는 개인의 실수가 아니라 자신이 이끄는 전체를 공동체를 위험으로 빠뜨리는 참사다. 공동체는 신뢰, 정의, 평등과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가 떠받치는 보호해야할 연약한 구조물이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이스라엘이 근간을 흔드는 일로 누군가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이스라엘의 국부인 다윗을 이렇게 초라하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방치할 수는 없다. 그의 체면을 살리기 위해 ‘나단’이란 예언자가 등장한다. 나단은 느닷없이 다윗을 찾아와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런 이야기는 듣는 사람의 마음에 들어가 스스로 자신의 돌아보게 만들기 때문에 위대하다.

“어떤 성읍에 두 사람이 살았습니다. 한 사람은 부유하였고, 한 사람은 가난하였습니다. 부자에게는 양과 소가 아주 많았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에게는 시장에서 사다가 키우는 어린 암양 한 마리밖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는 이 어린 양을 자기 집에서 길렀습니다. 그래서 어린 양은 그의 아이들과 함께 자라났습니다. 어린 양은 주인이 먹는 음식을 함께 먹고, 주인의 잔에 있는 것을 함께 마시고, 주인의 품에 안겨서 함께 잤습니다. 이렇게 그 양은 주인의 딸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부자에게 나그네 한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부자는 자기를 찾아온 손님을 대접하는데, 자기의 양떼나 소떼에서는 한 마리도 잡기가 아까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가난한 사람의 어린 암양을 빼앗아 도축하여, 자기를 찾아온 사람에게 대접하였습니다.”

다윗은 그 부자가 못마땅하여 그를 죽여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나단은 바로 그 순간에 다윗을 책망한다. “당신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이제 다윗은 인생의 최대 위기를 맞이하였다. 자신이 숨어서 한 범죄를 고백하는 순간 그는 더 이상 존경받는 이스라엘의 왕이 아니라 파렴치한 인간으로 전락할 것이다. 그는 고민한다. 그는 일개 예언자의 이야기를 무시하고 그를 투옥시키거나 사형을 언도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잘못을 바로 인정하고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내가 신에게 죄를 지었습니다.” 죄에는 항상 대가가 따른다.

다윗은 지도가가 지녀야할 가장 큰 덕목을 이 대목에서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다윗의 정치적이며 군사적인 업적이 그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만들었다면, 그의 신속한 실수 인정과 고백이 그를 “예수의 조상”이란 인류의 가장 위대한 지도자로 등극시켰다.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 난 아이는 죽었지만, 솔로몬이 둘 사이에서 태어났다.

로마 철학자 키케로가 말한다. “실수하는 것은 인간적이다. 그러나 실수를 인정하지 않고 부인하는 자는 바보다.” ‘잘못 시인’은 위대함을 갈망하는 위대한 인간에게만 주어지는 절호의 기회다. ‘잘못 인정’은 탁월한 지도자의 방점이다. 당신은 조용한 가운데, 자신들 돌아보십니까? 당신의 잘못을 공개적으로 시인할 용기가 있습니까?


사진

<다윗을 꾸짖는 나단 선지자>

벨기에 화가 유진 시베르트(1851–1931)

유화, 1931, 116 cm x 145 c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