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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月曜日) “신은 누구인가?”

2025.2.3 (月曜日) “신은 누구인가?”

     

신은 존재하는가? 사람들은 이 질문에 대게 세 가지 방식으로 대답한다. 첫째,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소위 무신론無神論이다. 특히 유물론자들에게 신은 인간의 나약함이 만들어낸 허상이자 민중의 아편이다. 둘째, 신은 존재한다. 소위 유신론有神論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신의 존재를 믿는 사람들은, 신은 실재하며, 인간의 길흉화복을 주관하며, 지금도 자신들의 행위를 관찰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들에게 신은 전지전능하다. 특히 인간들이 지상에서 생명을 마치면, 신들은 그들의 잘잘못을 따져, 천국과 지옥으로, 혹은 다른 생명의 모습으로 윤회시켜 지상에 보낼 것이다. 셋째, 인간은 신이 존재하는지 혹은 존재하지 않는지, 알 수 없다. 소위 불가지론不可知論이다. 우주의 본질은 ‘물자체’는 인간의 인식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철학자 스피노자나 과학자 아인슈타인은 대표적인 불가지론자들이다. 아인슈타인은 신을 정의할 수 없지만, 과학을 넘어서는 현상에 대한 인간의 반응을 신비神祕와 경외敬畏라고 말한다. 그에게 무한한 우주는 신비일 수밖에 없으며, 그 앞에서 인간은 손으로 입을 막고 조용히 눈물을 흘리는 경외를 경험한다.

     

카라바조가 본격적으로 성서에 등장하는 신비하고 경이로운 장면을 포착하여 그렸다. 그는 당시 어떤 신학자나 종교인도 발굴해내지 못한 성서의 핵심을 우리에게 묻는다. 인간이 떠올릴 수 있는 가장 궁금한 질문인 ‘신은 누구인가?’다. 그는 <누가복음> 16장에 등장하는 소위 <엠마오 저녁식사> (1602)라는 작품에서 이 질문에 대답한다. 그는 복음서 저자가, 문자와 문자 사이의 침묵의 공간에 꽁꽁 숨겨놓은 비밀을, 그 자신도 그림에 숨겨놓았다. 자세히 보려는 자에게 주는 보물이다.

     

카라바조는 1601년 말에 델 몬테 주교의 집을 떠났다. 그는 그곳에서 산 루이지 데이 프란체지 성당을 장식할 마태 그림 세 점을 그렸다. <마태의 영감>, <마태의 소명>, <마태의 순교>다. 프랑스 출신 추기경 마테오 콘타렐리가 유산을 남겨, 마태에 관한 성당장식화를 부탁했기 때문이다. 그 후, 그는 로마 교황청의 또 다른 유력한 사제인 지롤라모 마테이Girolamo Mattei의 초대 응했다. 마테이 가문은 티베르강과 캄피돌리오 사이에 위치한 벌집모양의 로마 전통적인 귀족과 왕족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는 이곳에 1601년 6월부터 1603년까지 마테오 가문이 초정한 가장 유명한 화가로 지냈다. 추기경 지롤라모는 세 형제중 둘째다. 그의 한 살 많은 형 치리아코와 열 살 아래인 아스드루발레는 모두 열렬한 예술작품 수집가들이었다. 그들은 고대 로마 조각작품 뿐만 아니라 동시대 유명화가들을 후원하여 작품을 발주하였다. 1602년 1월, 첫째인 치리아코 마테이 장부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등장하였다: ‘주님이 빵을 떼는 그림’을 위해 카라바조에게 지불하다.

     

‘주님이 빵을 떼는 그림’ 현재 런던의 국립미술관에 소장중인 <엠마오 저녁식사>(그림 1)다. 이 그림은 <누가복음> 16장에 등장하는 이야기다. 예수가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 처형을 당한 후에, 실의에 빠져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두 제자가 있었다. 아마도 누가와 글로바일 것이다. 이들은 예수를 정치적인 메시아로 생각하였다. 그가 혁명을 일으켜 로마제국을 전복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예수가 힘없이, 도살장에 끌려간 어린양처럼 비참하게 처형당하자, 자신들의 고향인 온천마을 엠마로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 도상에서 한 낯선 자를 만난다. 이 세 명은 오후 내내 한참 대화를 나누며, 지난 주 골고다 언덕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 대화한다. 어느새 해가 저물었다. 엠마오에 도착한 두 제자는 자신의 마을로 들어갈 참이었다. 그런데, 이 낯선 자는 가야할 길이 멀었다. 낯선 자가 자신이 가야할 길이 멀다고 더 가려고 하자, 그들은 그를 강제로 만류한다. 밤길이 위험하니, 자신들의 집에서 묶고 날이 밝으면 떠나라고 요청한다. 낯선 자는 이들의 집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다. 카라바조는 낯선자와 두 제자가 지낸 시간 중 한 순간을 집중하였다. 바로 <누가복음> 16장 30-31절이다. “그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실 때에, 예수께서 빵을 들어서 축사하시고, 떼어서 그들에게 주었다. 그제서야 그들의 눈이 열려서, 예수를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 순간 예수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졌다.” 그 순간에 누가와 글로바가 눈이 열려 예수를 알아보는 순간을 포착하였다.

     

이 그림에 네 명이 등장한다. 식탁에 앉아 있는 예수, 누가, 글로바, 그리고 이 역사적인 순간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는 무명의 여관주인이자 동시에 그림을 응시하는 우리다. 예수는 붉은 옷에 흰색 옷을 왼편에 걸쳤다. 승리의 부활을 상징하는 색이다. 그는 오른 손을 들어 강복하면서 자신이 누구인지 알린다. 지그시 눈을 감고 아직 떼지 않는 단단한 빵에 강복하는 모습에서, 그는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고 성만찬 의식에 자신이 현존하고 있다는 선포한다. 가톨릭교회가 말씀중심의 개신교 종교개혁과는 달리, 회화중심의 자체 종교개혁을 시도한 최고의 작품이다. 식탁 위, 삶은 닭의 말라비틀어진 발톱은 인간인 곧 죽고만다는 멸절성에 대한 애처로운 상징이 죽음을 극복한 부활한 그리스도의 손과 대비되었다. 시골의 검박한 식탁이 성만찬이 된 것이다.

     

<누가복음>에서는 엠마오가 예루살렘에서 한 나절 걸리는 거리에 있다고 기록하였지만, 카라바조에게 엠마오는 당시 로마인의 가정과 같은 일상의 공간이었다. 그가 친구를 만나고 자신을 싫어하는 사람과 만나 토론을 하는 선술집이다. 예수가 자신이 누구인지 알리자, 여관주인은 영문을 모른다. 그는 이 창백하고, 순박하게 생긴 청년과 남루한 옷을 입은 두 친구가 자신이 차려놓은 저녁식사를 지불할 돈이 있는지, 깊은 고민에 빠진 얼굴이다.

     

반면에 누가와 글로바는 이 낯선 자가 부활한 예수라는 사실을 깨닫고 너무 놀라 얼어붙었다. 우리에게 등을 보이는 제자는, 의자를 당기면서 몸을 세운다. <성 마테의 소명>에 등장한 의자와 동일하다. 그가 의자를 당기면서 뾰족한 팔꿈치가 그의 초록색 겉옷을 찢었다. 속에 입고 있던 흰색 셔츠가 보인다. 또 다른 제자는 가슴에 자신이 순례자라는 사실을 알리는 조개껍질을 매달았다. 그는 예수를 알아보고 너무 놀라 양팔을 벌릴 수 있을 때까지 벌렸다. 심지어 식탁위에 있는 과일 바구니도 식탁에서 떨어지직 직전이다. 소위 트롱프 뢰유(Trompe-l'œil 트롱프 뢰유, 즉 보는 사람들이 실물인 줄 착각하도록 만든 장치다. 보는 우리가 손을 뻗어 바구니를 식탁에 올려놓고 싶은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그의 모습은 십자가에 못 박혀 매달린 예수의 모습이다. 그이 몸짓은 우리에게 묻는다: ‘자신이 분명 두 눈으로 확인한, 십자가에서 처형된 예수가, 이렇게 살아서 숨을 쉬고 말을 할 수가 있는가?’ 예수의 손과 놀란 두 제자는 현실과 꿈 사이에서 유영한다. 한 제자의 펼친 두 팔중, 오른 팔은 알 수 없는 암흑 속에서 소멸하고 있지만, 왼 팔과 손가락은 거의 이 그림을 보고 있는 내 얼굴에 닿은 정도다.

     

카라바조는 이 그림을 통해 <누가복음> 저자가 성서에서 묻지 않는 질문을 던진다. 이와 같은 기적이 일어난다면, 당신은 어떻게 반응하시겠습니까? 부활한 예수가 지금-여기에 나타난다면, 당신은 그를 알아 볼 수 있습니까? 이 기적이 두 제자에게 일어난 근본적인 계기는 무엇인가? 그들이 한 낯선 자를 만나,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가는 한나절 내내, 그가 부활한 예수인지 알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의 마을에 도착한 후에, 밤길에 가야하는 이 낯선 자에게 자비를 베풀었다. 그들은 그를 자신이 아는 마을 여인숙에 들러 묶고 가라는 비이성적인 호의다.

     

두 제자는 여관으로 들어가 낯선 자를 위해 식사를 마련한다. 낯선 자는 이들의 융숭한 대접을 받고 감사의 기도를 올린다. 그러자 기적이 일어난다. 두 제자의 눈이 열려 그가 누구인지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 그런 후 그(예수)는 그들의 눈에서 바로 사라졌다. 이 만화의 한 장면과 같은 내용을 어떻게 이해해야하는가? 누가는 왜 예수가 제자들 눈앞에서 사라졌다라고 기록했는가? 나는 두 가지 이유에서 누가가 그렇게 기록했다고 상상했다. 첫째는, 이 두 제자가 부활한 예수를 모시고 자신들만이 부활한 예수를 만났고, 그 예수만이 진짜라고 주장할 오만을 보았을 것이다. 한마디로 종교 장사할 가능성이 많았다. 둘째, 누가는 부활한 예수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부활한 예수는 그들이 길에서 마주친 낯선 자였다. 두 제자가 낯선 자를 그냥 지나쳤다면, 그들은 영원히 예수를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이 종교시설이나 종교교리에 갇힌 예수에 익숙했다면 그런 예수는 이미 십자가에서 죽었다. 누가는 부활한 예수를 이렇게 묘사했다. 두 제자가 생면무지의 낯선 자에게 분에 넘치는 호의를 보였을 때, 그 낯선 자는 더 이상 낯선 자가 아니라 부활한 예수다. 부활한 예수는 종교시설에 안주하고나 설교나 교리에 의해 정의되지 않는다. 그는 자비를 베풀 때 언제나 어디서나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낯선 자다. 낯선 자는 잠재적인 부활한 예수다. 그는 인간이 자비를 베풀 때, 잠시 등장했다 사라지는 자다. 그리스도교는 이 간결하지만 강력한 사랑의 실천으로 지난 2000년 동안 유지해왔다. 낯선 자가 신이다. 곤경에 처한 낯선자에 대한 나의 자비가 신이다.

     

그림 1

<엠마오 저녁식사>

카라바조 (1571-1610)

유화, 1601, 141 cm × 196.2 cm

런던 국립미술관

     

그림 2

<엠마오 저녁식사>

카바바조 (1571-1610)

유화, 1606, 141 cm x 175 cm

밀라노, 피나코테카 디 브레라 미술관

(밀라노 버전 그림은 전체적으로 어둡다. 카라바조가 라누키오 토마소니를 살해한 후에 로마를 떠난 후에 그린 그림으로 그의 불안하고 암울한 심정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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